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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향원의 몰락 / 김우재

등록 2020-12-28 14:01수정 2020-12-29 02:41

김우재|낯선 과학자

1872년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엔 트레모라는 과학자에 대한 찬사가 발견된다. 그는 트레모의 책이 “다윈을 넘어서는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썼다. 트레모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하다. 트레모는 아마추어 건축가로 탐욕스러운 자료 편찬 능력을 이용해 다윈의 이론을 곡해한 엉터리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과학 지식에 해박했던 엥겔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트레모의 이론도 자본론에 담겼을지 모른다. 당대에 마르크스에게까지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역사는 트레모를 기억하지 않는다.

엥겔스는 1870년대 후반 <반뒤링론>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오이겐 뒤링의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뒤링이라는 이름 또한 엥겔스의 저작으로만 역사에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오이겐 뒤링의 사상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당대 독일의 주요 지식인조차 확고한 지지를 표방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뒤링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한 사상가였다. 엥겔스의 <반뒤링론>은 공상주의적 사회주의가 만연한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을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 현실화하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도가 담긴 책이다. 지금은 이름조차 낯선 뒤링이라는 엉터리 사상가 한명을 저지하기 위해 엥겔스와 마르크스라는 두 대가는 친히 전장에 나섰다.

최근 한국 방송계에서 잘나가던 몇몇 셀럽 강연자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으로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던 혜민은, 자신이 책에서 주장하던 무소유의 원칙과 상반되는 풀소유의 삶으로 대중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의혹은 물론, 천만원대의 강연료를 자신이 운영하는 마음치유학교를 통해 사유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혜민은 한국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구가하던 인플루언서였고, 한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지식인 중 그와의 인연을 강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역사 강사로 유명한 설민석은 클레오파트라 강의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집트학 연구자인 곽민수 소장에 의해 야기된 이 논란은 방송계가 인문학 강연 콘텐츠를 대중에게 무분별하게 내보내는 관행 속에, 오래전부터 우려하던 일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에 불과하다.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의 특성상 방송을 제작하는 이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대중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강연하는 이들을 선호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학술적 검증과 엄격함은 실종된다. 설민석 외에도 이미 한국 방송계를 장악하고 있는 지식인 셀럽들의 강연이 논란이 된 건 한두번이 아니다. 인문학뿐 아니라 과학 또한 과학대중화라는 미명하에 온갖 비전문가들이 과학 강연 시장에 뛰어들어 과학 강연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

다윈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다윈에겐 박사 학위가 없다. 그는 학위가 없는 아마추어 박물학자였다. 아마추어 독학자로 생을 마감했을지 모를 다윈을 진화론의 시조로 만든 학문적 태도의 비밀은, 사후에 발견된 방대한 편지들 속에 담겨 있다. 다윈 서신이라 불리는 이 편지들 속에는, 아마추어 학자에 불과했던 다윈이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당대의 학자들과 자신의 발견을 공유하고 토론했는지에 대한 역사가 담겨 있다. 다윈은 대중적 유명세보다 자신의 저술 속에서 완결성을 추구했다. 그것이 다윈이 트레모나 뒤링과는 달리 역사에 기록되는 이유다.

학문이 상아탑에서만 논의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식인의 책무 중 하나는 사회의 공익을 위해 언제든 자신이 배운 학문을 알리는 것이다. 공자는 그럴싸한 말로 민심을 현혹하는 이들을 향원이라 불렀고, 맹자는 이들을 사이비라 호칭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공자와 맹자도, 모두 향원의 몰락을 위해 싸웠다. 엉터리 학문이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어도 조용한 학계가 비겁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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