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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천천히 오는 기쁨 / 이안

등록 2021-01-04 15:00수정 2021-01-05 14:05

이안 ㅣ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새해가 가까워 오면 한 해 동안 같이 살 ‘올해의 말’을 준비한다. 기대거나 경계로 삼거나 실천해 볼 만한 말을 구해 일 년 동안 같이 살며 말과 나를 꾸준히 길러 보는 것이다. 올해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오는 기쁨’을 올해의 말로 정했다. 지난해에 드린 기도의 응답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응답을 받을 때까지 이 말을 더 붙들고 있어야겠다는 고집이 생겼다. 너무나 천천히 와서 안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쁨이라면 몇 해에 걸쳐, 아니 일생을 두고 놓지 않는 고집을 부려도 좋지 않을까. 그럼 ‘올해의 꽃’으로는 마리골드가 맞춤하겠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을 꽃말로 지녔으니.

지난해엔 경북 상주 청리초등학교 4학년 김용구 어린이가 쓴 ‘풀’이란 시를 자주 외며 다녔다. “독 새에 풀 한 포기 억지로 빠져나와 해를 보려고 동쪽으로 고개를 드는데, 동생들이 호매로 쪼아가면 그 풀뿌리는 또 억지로 나오니라고 얼마나 외로이 얼마나 애를 먹을까?” 행과 연을 나누지 않고, 열한 살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길다 싶은 한 문장의 호흡으로 구불구불 걸어간 시다. “독”은 돌, “호매”는 호미의 상주 사투리다. 1978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어린이 시교육 현장에서 교과서로 삼고 있는 〈일하는 아이들〉(이오덕 엮음)에 들어 있다.

시를 쓴 날짜는 1964년 3월7일. 봄풀이 번지며 조금씩 눈에 거슬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 아이가 보는 자리는 남다르다. 밖으로 올라온 풀포기가 아니라 씨앗 하나가 눌려 있던 돌 밑의 시간이다. 몇 년인지 몇십 년인지 몇백 년인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돌 밑 어둠에 눌려 있던 씨앗 하나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어렵사리 싹이 터 돌 사이로, 어둠 밖으로 기어 나온 거다. 풀 한 포기의 우여곡절을 직관하는 깊이다. 씨앗의 입장에선 얼마나 천천히 온 기쁨일까. 얼마나 어렵사리 얻은 기쁨일까. 이 시는 나에게 ‘타자의 윤리, 생명의 리듬’이란 화두를 던져 주었다. 당신이 아닌 내가 어떻게 내가 아닌 당신의 슬픔에 가닿을 수 있을지.

지난해엔 이 시와도 같이 걸었다. “눈이 안 오는 날/ 눈이 와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어느 날// 눈이 왔다.” ‘눈이 안 오는 날’이 제목이다. 대상의 부재→있게 해 달라는 기도→기어이 도착하는 응답의 구조로 짜였다. 무엇보다 행갈이와 연 나눔이 절묘하다. 1연과 3, 4연을 잇는 2연의 접속사 “그리고”도 눈여겨보게 된다. “눈이 안 오는 날”과 “눈이 왔다” 사이엔 기도가 있고 짧지 않은 기다림이 있었다. 그것을 “그리고”와 연 나눔에 담아냈다. 광주남초등학교 1학년 신율 어린이가 썼다. 쓴 날짜는 2019년 6월8일, 초여름이다. 여덟 살 아이가 겪은 지난겨울 이야기인 셈이다. 안 오는 게 아니던걸. 너무 천천히 와서 안 오는 것같이 느껴질 뿐이었어.

박성우 시인의 ‘몇 번이나 업어 줬어?’도 자주 떠올린 시다. “나중에 아빠 늙으면/ 규연이가 아빠 업어 줘야 해?// 그래, 알았어.// 근데 아빠,/ 아빠는 할머니 몇 번이나 업어 줬어?” 동시집 〈우리 집 한 바퀴〉에 나오는 얘기다. 규연이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거다. 아빠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그런 게 아니고. 올해부터는 당신에게 바라는 게 있으면 그걸 내가 먼저 당신에게 해야겠다. 지난 연말 제3회 권태응문학상을 수상한 함민복 동시집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에 ‘반성’이란 시가 있다.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올해는 내 자리에 당신을 먼저 두는 일을 많이 만들고 싶다.

‘천천히 오는 기쁨’은 안 오는 시간을 오래 기다리며 걷는 이에게 기어이 도착하는 기쁨이다. 안 오는 게 아니야. 너무 천천히 와서 안 오는 것같이 느껴질 뿐.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말고 마리골드에겐 꽃말이 하나 더 있다. ‘헤어진 친구에게 보내는 마음’. 이건 코로나19에게 얼른 들려 보내고 싶은 꽃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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