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경ㅣ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새해 벽두부터 온갖 여론조사 결과들이 언론사와 포털의 첫 면을 장식했다. 4월엔 보궐선거가 있고 내년 3월엔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정당들은 여론조사 공천을 할 테고 언론사들은 1년 내도록 후보군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을 것이다. 갈등적인 국회 법안이나 정부 정책을 둘러싼 단타 여론조사도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여론조사로 점철될 2021년’을 앞두고, 여론 없는 여론조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다.
여론조사는 당연하게도 ‘여론’을 조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여론’을 조사해서 정부 정책결정자, 국회 입법자, 공천을 관리해야 하는 정당 지도부, 시민들에게 유의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그러니 논리적으로는 여론이 선행해야 조사 결과가 의미를 갖는다. 여론조사의 대상은 시민들의 생각이나 판단이다. 좋거나 나쁘거나,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대안들 가운데 우선순위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시민들이 답을 하려면, 먼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판단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응답들이 모여야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론을 조사해 공표하는 일이 다반사다.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모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직 판단하지 않은 문제를 물어본다면? 아마 전화를 끊거나 다른 기준에 의한 답을 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정부가 제시한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책에 대해 모르는 나는 집권 정부에 대한 호불호를 기준으로 답을 할 수 있다. 정부를 강하게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책을 몰라도 답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말을 해야 할 강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과대 대표되는 이유다. 이렇게 조사된 결과는 대통령 지지도일 수는 있어도 △△정책에 대한 여론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조사들이 미치는 엄청난 결과다. 아직 여론이 형성될 만큼 충분히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고 판단을 형성할 공론장조차 열리지 않았는데, 여론조사 결과라는 것이 공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부 정책결정자들은 △△정책이 지금 이 순간 지지를 받거나 받지 않는다고 착각을 하게 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 정책을 밀어붙이거나 자신감을 잃고 폐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충분한 정보를 갖게 되고 서로의 논의를 통해 판단을 형성했을 때 그 결과값이 정반대가 된다면? 사건 초기 발표된 그 여론조사는 결과적으로 정부 정책 과정을, 국회 입법 과정을, 정당 공천 과정을 왜곡한 것이 된다.
500표본, 700표본의 설익은 여론조사 결과로 재미를 본 언론사들은 점점 더 본분을 잊는다. 사안의 발생 초기에 정부와 국회,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주된 내용이 무엇이고 갈등하는 쟁점은 무엇이며 대안은 무엇인지를 캐물어 시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할 책임은 망각한 채, 소설에 가까운 조사 결과 해설로 지면과 방송을 채운다.
더 큰 문제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생각 멈춤’ 상태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나는 ‘그게 뭐지?’ 단계에 있는데 ‘다수의 생각은 이렇다더라’는 결과가 공표되어버린다면? ‘나만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문제에 대해 정보를 찾거나 판단을 갖기 위해 동료 시민들에게 물어보는 일 자체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시민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이런 종류의 정보들을 접하게 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정부와 정당은 정보 제공과 설명의 책임을 잊고 언론은 정보 전달의 책임을 잊고 생각과 판단을 멈추는 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2021년 여론조사 의뢰자와 시행자 모두 여론 있는 여론조사를 해주면 좋겠지만 불가능할 것이다. 시민들이 복잡한 현안에 대해 정보를 얻고 판단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최소 2~3주는 걸린다고 한다. 여론 없는 여론조사 결과를 정보저장고에 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