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ㅣ 영화감독
작년 1월, 애인과 나는 교토의 신쿄고쿠 시장을 걷고 있었다. 새해의 기운과 더불어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고 오랜만에 일본에 온 애인 역시 아침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교토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주변이 온통 생의 에너지로 가득했기에 내 상태가 더 절망스러웠다. 삶에서 이런 시기가 가끔 찾아온다. 그 상태는 낯설고 두렵기에 본능적으로 숨기거나 즐겁게 지내려 노력한다. 교토의 거리에서 밝게 시내를 거니는 나와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무감각한 내가 있다.
30대에 경험한 절망과 슬픔이, 막아놓은 둑 같던 감정들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지난 7년의 과업이었던 작품을 끝내고 겨우 쉬러 온 여행지에서 비로소. 이런 것들은 처음에는 말로 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몸으로 말한다. 삶의 어느 시기에 내 몸은 가려웠고, 붉은 두드러기가 났고,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몇년이 흘러서야 그때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었던 것이었음을 알았다.
베셀 반 데어 콜크 박사의 <몸은 기억한다>는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에 대해 집대성한 책으로 우리가 때로 느끼는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에 대해 언어화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떠올랐는데 두 책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단이 ‘완벽한’ 가정주부 역을 수행하던 1960년대 미국 여성들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허함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반 데어 콜크는 ‘말할 수 없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는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전쟁,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기 트라우마 등으로 과거 사건의 플래시백과 함께 극심한 신체 증상을 겪는 사람들, 혹은 트라우마 이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환자들의 사례와 치유 과정을 다룬다. 반 데어 콜크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기생충’처럼 끊임없이 되살아나 과거를 재현하는 감정들에 환자들이 압도되지 않도록 돕는다. 그는 이미 일어난 과거를 받아들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감각과 감정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찾아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끼고, 정확히 밝히고, 확인하는 것’이 회복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
반 데어 콜크는 트라우마가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된 것같이 혹은 ‘그 누구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건이 끝났음을 인지하고 자신의 몸, ‘자기 자신’과 다시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접촉을 위해 박사는 연극 치료, 두개천골 요법,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 요가, 명상 등 ‘대안적’이라는 단어로 폄하되어온 방식을 과학적 수치로 접근한다. 그는 이러한 치유 요법들이 약에 의존하는 서구적 치료 방식보다 어떻게 진정으로 대안적인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라우마에 관해 쓰고 말하는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교토에서의 셋째 날이었다. ‘정상’처럼 보이려는 노력에 질식한 나는 애인에게 고백했다. 지금 완전히 세상과 분리된 기분이라고. 애인은 무척 놀랐고 조심스레 답했다. “조금 우울해 보이긴 했지만 네가 그런 마음 상태인지는 몰랐어. 보라, 이 여행에서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수 있으면 좋겠어.” 그는 이야기를 더 깊게 하고 싶은지 아니면 침묵을 원하는지 물었다. 나는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고 그저 내 상태를 알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날 저녁 애인은 온몸의 촉수를 세워 내 곁에 조용히 있었다. 깊은 안도감을 느꼈고 교토에 온 뒤 처음으로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반 데어 콜크의 은사 엘빈 셈라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천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결코 나아질 수 없다.” 새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깊게 응시하여 우리가 보다 자유로워지기를. 우리가 자신을 진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