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의 이 결과물은 산업재해 유족과 노동계가 기대한 내용과는 거의 닮지 않은 물건이다. 제6공화국은 또다시 무거운 업보 하나만 늘렸다.
이런 ‘무늬만 중대재해법’의 시대가 개막할 즈음 나는 이 현실과 더없이 대비되는 책 한권을 읽었다. 마이스터고를 나와 현장실습생, 산업기능요원으로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지금은 글쓰기에 전념하는 작가 허태준의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호밀밭, 2020)가 그 책이다.
1970년대나 80년대였다면, 이 책은 아마 ‘노동 르포’라고 불렸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그렇게 분류됐던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전태일 평전 등과 함께 그 후의 격변과 시대정신에 큰 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추억 속 장르만은 아니다. ‘세습 중산층’을 말하면 욕을 먹고 ‘노동’ 옆에는 ‘귀족’을 붙여야 한다는 이상한 나라이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계보를 잇는 글들의 가치는 측량할 길 없다. 플랫폼 산업 노동자나 이른바 ‘임계장’ 세대를 다시 바라보게 한 책들도 있고, 은유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 2019), 허환주의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후마니타스, 2019)처럼 중소기업 사업장에서 사회와 처음 맞닥뜨리는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길을 연 저작들도 있다.
하지만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가 좀 더 각별한 것은 청년 노동자가 직접 풀어내는 이야기라는 점 때문이다. 이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찾아 읽고 고뇌하며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잇따른 충격적 재해에 자기 일인 듯 아파하는 20대 노동자의 육성이다. 그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벌어진 같은 또래 노동자의 죽음을 고발하는 전단이 거리에 너무 쉽게 버려지는 광경을 보면서 “버려짐”에 대해 곱씹으며 “이럴 수는 없다”고 외친다. “모두가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저녁이 있는 삶’도 아닌 그냥 ‘삶’의 빛이라도 살려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213쪽)
이 대목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란 중에 온라인 기사들에 달렸던 댓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다수는 이런 법률을 제정하면 기업을 어떻게 운영하란 말이냐는 항변이었다. 물론 이것은 국회 내 양대 정당이 ‘무늬만 중대재해법’을 제정하게 한 주된 힘 중 하나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균열을 확인한다. 그것은 구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라짐도 아니고, 허깨비 같은 한국식 보수와 진보의 싸움도 아니다. 진정한 대립선은 “누구의 삶도 함부로 버려져선 안 된다”와 “그래서 어떻게 기업을 굴리냐”는 두 문장 사이에 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는 이 진실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묻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저자와 그의 친구들은 대학에 가지 않고도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마이스터고를 선택했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 그들이 대면한 현실은 이 약속을 보란 듯이 배반했다. 이 상황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색하고 묻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될 수 있을까”(22쪽)라는 물음 말이다.
실은 이 사회가 결코 답할 수 없는, 아니 입 밖에 내지 못하게 막는 질문이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묻지 않아야만, 이 모든 너절한 일상이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늬만 중대재해법’ 시대가 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바로 이 물음을 던지며 답을 찾는 정치가, 사회운동이, 일상의 문화가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되길. 그것이 “옳은 일을 할 때, 억울함이 없게”(244쪽)라는 젊은 영혼의 기도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