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ㅣ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동심’과 상관없이, 아니 그것에서 뚝 떨어진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 같은 일이 적지 않다. 이런저런 못된 짓,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은 일, 참 많이 하며 자랐다. 그중에는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상하게 한 일, 잠자리며 개구리를 해친 일도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옛날 아이들 다 그러며 자랐는데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느냐 해도,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었으니까. 아니, 함께 어울린 아이들이 다 그랬다 해도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류선열(1952~1989) 동시집 <잠자리 시집보내기>(문학동네, 2015)에는 그 시절 아이들의 ‘놀이’를 재현한 작품이 몇 편 나온다. 전래동요에 산문을 결합한 매우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는 작품들인데, 가령 이런 내용이다. 아이들은 잠자리를 잡아 “꽁무니에 밀짚을 매달아” 한 마리씩 날려 보낸다. 잠자리를 유인하는 노래가 있다. “파리 동동/ 잠자리 동동/ 잠자라 잠자라/ 여기여기 앉아라./ 멀리멀리 가아면/ 똥물 먹고 죽는다.” 잠자리를 잡은 다음엔 누구 잠자리가 더 멀리 날아가는지 내기를 했다.(‘잠자리 시집보내기’) 내 경험으론 꽁무니에 밀짚을 매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꼬리 부분을 끊어 내면 구멍이 생긴다. 여기에 바랭이 꽃대같이 매끈한 것을 끼워 날려 보냈다. 자기 몸무게쯤 되는 꽃대를 달고 비틀비틀 날아올라 지붕 너머로 무겁게 가라앉던 잠자리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지루한 장마가 그치고 하늘이 파랗게 맑은 날 아이들은 개울가에 모여 놀았다. 사납게 흘러가는 “황톳빛 개울물에 방울낚시 던져 놓고” 물고기 입질이 오기를 기다리며 개구리 장사를 지낸다. 부르는 노래가 가관이다. “개굴아 개굴아/ 늬 아부지 죽었다./ 부뚜막에 앉아서/ 밥투정하다 죽었다.// 개굴아 개굴아/ 늬 아부지 죽었다./ 술독 위에 앉아서/ 술타령하다 죽었다.” 문제는 노래를 들으며 개구리들이 당하는 참사다. 아이들은 개구리 몇 마리를 잡아 “똥구멍에 바람을 넣어서” “두 눈이 꽈리처럼 불거지고 배때기가 한껏 부푼 개구리 상주들”에게 “꺼이꺼이” 곡을 시킨다.(‘개구리 장사 지내기’)
류선열의 작품이 직접적으로 독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건 아니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인상적으로 재구성해 독자 앞에 놓아줄 뿐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나 사이에 객관적 거리가 확보되고, 그 거리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내 행동을 바라보게 한다. 독특하게 설치해 놓은 ‘시간의 문’이다.
이오덕이 엮은 <일하는 아이들>(보리, 2002)에서 나보다 대여섯 살 위인 옛날 어린이가 쓴 시 한 편을 만났을 때의 충격은 너무나 강렬했다. 1969년 5월3일, 안동 대곡분교 3학년 어린이 백석현은 ‘청개구리’란 시를 쓴다.
“청개구리가 나무에 앉아서 운다./ 내가 큰 돌로 나무를 때리니/ 뒷다리 두 개를 펴고 발발 떨었다./ 얼마나 아파서 저럴까?/ 나는 죄 될까 봐 하늘 보고 절을 하였다.”(전문)
읽는 순간 어디선가 ‘꽝!’ 하는 굉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내 안의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으리라. 석현이는 청개구리를 죽인 게 아니다. 기절시킨 것뿐이다. 그런데도 “죄 될까 봐” 두려워 절을 하였다니. 나는 많은 개구리를 잡아다 닭 먹이로 주면서도 개구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 나는 나쁘게 태어난 걸까? ‘청개구리’는 동시대를 산 다른 아이를 통해 나를 바라보게 한 시간의 문이다.
굳게 봉인돼 있던 시간의 문을 열고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운 장면만큼이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동반하는 장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얼른 문을 닫고 못 본 것으로 치부할 순 없다. 시간의 문 안에는 괜찮은 어른이 되어 자기를 구하러 오길 기다리는 어린 내가 살고 있으니까. 그 아이 하나하나를 데려와 지금의 내 안에서 다시 살게 할 책임이 나에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