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를 미워하는 힘으로 버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쓸데도 없는’ 딸이 셋이나 있던 아부지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넷째 딸. 아부지처럼 안 사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나는 십대의 넘치는 에너지를 오로지 아부지를 미워하는 데 썼습니다. 중간에서 시달리다 못해 무당을 찾아간 엄마는 ‘둘이 한집에 살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박수의 점사를 들고 와선 연속극에서처럼 머리에 띠를 매고 앓아눕고 마침내 저의 가출을 묵인, 방조하게 됩니다.
엄마가 준 오천원을 들고 집을 나와 1600원짜리 부산행 기차표를 끊어 같은 한국이지만 말 한마디 못 알아듣는 부산에서의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고단하고 서러워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천리타향 객지에서도 아부지가 그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의 아부지들은 내남없이 대부분 그 모양이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습니다. 우리 아부지만 날 미워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 아부지만 아들을 물고 빨고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연년생이었던 남동생의 완벽한 보호자로 신발을 잃어버려도 내가 찾으러 다니고, 가방이나 모자를 잃어버려도 온 학교, 온 동네를 헤집어서 찾아내야 하고, 동생의 몸에 멍이나 조그만 흉터가 있어도 “동생 안 보고 뭐 하간?” 불호령을 들어야 했습니다. 동생이 깬 재떨이 때문에 내가 맞은 날은 그 추운 강화도 송해 벌판을 울며 건너 눈물로 젖은 얼굴이 터지기도 했었죠.
학교를 오갈 때는 ‘가방모찌’로, 강화의 그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 날 밤새 줄을 서서 중앙교회에서 수백명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크림빵을 타다가 냄새도 못 맡아보고 동생에게 상납해야 했던 ‘빵 셔틀’로 넷째 딸의 ‘쓸데’를 한정했던 아부지. 집을 나오니 돈은 안 되고 몸은 고된 일들뿐이라 사는 건 고달파도 아부지를 안 보는 것만으로도 살 만했습니다.
노조 대의원에 당선되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온 후 아부지가 부산엘 왔었습니다. 안기부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었다며, 동네 부끄러워 못 살겠다며, 너 땜에 집안 다 망한다며,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갔다가 다쳤다는 다리를 끌며 다시 기차를 타러 가며 “돈도 번대민서 넌 아부지한테 짜장면 한 그릇 안 사주냐?”는 아부지, 아부지가 이북 사람이라서 온몸이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는 말을 뜨거운 쇠구슬처럼 삼키던 날이 지금도 서럽습니다.
97년 노개투(노동법개정투쟁) 총파업의 와중에 돌아가셔서, 죽어도 왜 하필 이렇게 바쁠 때 죽냐는 원망을 애도 대신 들어야 했던 아부지. 상복도 입지 않고 눈물도 한 방울 안 흘리는 걸로 마지막 복수를 했던 아부지와의 기나긴 애증의 세월.
선생님의 부고를 듣던 날 밤. 단 한 장 남은 아부지의 옛날 사진을 찾아봤습니다. 앨범 속에 끼지도 못한 채 버려지지도 못한 채 떠돌던 사진. 사진으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던 아부지. 명절이면 ‘불효자는 웁니다’를 다 못 부르고 꺼이꺼이 울던 아부지는 북녘땅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찾아갔을까요.
아부지랑 같은 말투를 쓰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지만 너무나 달랐던 분.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선생님의 책을 읽었을 때의 놀라움과 질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다니. 이런 아버지도 있을 수 있다니.
그 후 박창수 위원장의 장례 투쟁에서 동지를 사지로 밀어 넣은 듯한 죄책감에 숨죽여 울던 우리를 향해, 이 죽음은 안기부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고 국가폭력이라고 일갈하시던 말씀에 우린 죄책감에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며 운동권 절반이 ‘정권의 인사’가 되었을 때도 거친 거리마다 선생님은 여전히 계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요.
노무현 정권 시절 그야말로 재야가 사라지고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아 ‘철없는’ 투쟁을 할 때도 선생님은 늘 맨 앞에서 정권을 향한 비수 같은 말씀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셨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외롭고 어두운 터널의 한가운데에서 선생님께서 문정현 신부님, 박창수 위원장 아버님, 박종철 열사 아버님과 함께 한진중공업 담을 넘으시던 그날의 감동을 표현할 말을 저는 10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습니다.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도 가장 먼저 안아주시던 선생님.
병석에 누우셔서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열변이 “김진숙 힘내라”. 저의 복직투쟁도 그렇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도 그렇고, 노동자들은 기나긴 투쟁을 해야겠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고문, 대공분실, 국가폭력, 감옥.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이 많을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그만큼 앞으로 간 것이겠지요. 다음 세대는 그런 단어들을 못 알아듣길, 검색을 해도 얼른 알아들을 수 없는 세상이길 바랍니다. 다행히 그런 세상이 그리 멀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민주노총 지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