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기완 선생이 2017년 3·1절 서울 광화문과장에서 눈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박근혜 퇴진 촉구 촛불집회’의 맨 앞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회용 비옷 속에 이기연 대표가 지어준 ‘널마’ 덮개를 입은 모습이다.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1985년 ‘민청련 사건’ 구속자 가족들
민가협 꾸려 외롭게 싸울 때 ‘버팀목’
‘우리옷’ 지어드리니 ‘우리 딸’로 자랑
2014년 아주 두껍고 긴 ‘덮개’ 완성
‘널마’라 부르며 찬바람 거리 속으로
희망버스도 타고 촛불집회 붙박이도
마지막 길 모시저고리까지 입혀드려
“백기완 선생님은 옷을 누가 만들어 주시나봐요?”, “우리 딸이 해줍니다.”
백 선생님을 가까이서 뵙게 된 건 1985년, 전국의 감옥이 양심수로 넘쳐나던 ‘5공화국 시절’이었다. 내 남편도 그때 ‘민청련 사건’으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나를 비롯해 ‘민청련’ 구속자의 아내들은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함께 활동해왔기에, 그 악명 높은 고문의 강도를 직감하고 있었다. 곧바로 구속자 가족들과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을 창립해 공동대처하기로 했다. 모든 운동권이 지하로 잠적해야 했던 그때, 민가협은 결사대이자 선봉대였고,어머니들은 남의 아들딸까지 걱정하는 전천후·전국구 투사가 되었다.
그 외로운 투쟁의 시기, 백 선생님은 문익환·계훈제 선생님과 더불어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그 무렵 나는 백 선생님께 장산곶매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곧은 목지와 골굿떼 이야기도 들었다. 미대를 나온 내가 ‘민족적 형식’을 고민하는 ‘그림쟁이'에서, 형사와 안기부원들이 오금 저려하는 '순악질 여사'로 등극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무지막지한 국가 폭력 앞에서, 교양·품위·전문성, 이런 건 한낱 검불에 불과했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두려움이 엄습하는 매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어느날 후배들이 활동비가 바닥났다고 걱정하기에, 나는 백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들을 그려 병풍식 연하장을 만들어 팔게 했다. 제법 많은 수익금이 모였던 것 같다. 또 장산곶매, 백두산 호랑이, 장수말, 찌릉소, 옴두꺼비, 이심이 이야기들을 계속 그려 ‘민족 상징물’로 퍼뜨렸다. 백 선생님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백 선생님은 내가 만든 우리옷을 늘 입으셨다. 그럼에도 늘 ‘고구려 덮개'를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난 물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하냐고.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2014년 초겨울, 마침내 아주 두껍고, 아주 길고, 아주 넓은 ‘덮개’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그 옷을 ‘널마'라 이름 지으셨다. ‘널마'란 너른땅, 대륙을 뜻하는 백 선생님의 낱말이다.
고 백기완 선생은 2014년 이기연 대표에게 ‘고구려 덮개’처럼 두껍고 크게 방한복 ‘널마’를 지어 달라고 요청해, 한겨울에도 우리 사회 그늘진 현장을 찾아다녔다. 2017년 1월 촛불집회 때 널마를 차려입은 모습이다.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방한복 ‘널마’는 워낙 두껍고 무거워 웬만한 어른도 혼자서는 입고 벗기도 쉽지 않았다. 2017년 12월 널마를 입은 백기완 선생이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모습이다. 김경애 기자
‘널마'를 지을 때 선생님은 아주 두꺼운 옷감에 집착하셨다. 난 그런 선생님을 보면서, 여러 장면이 겹쳐 떠오르곤 했다. ‘황성옛터 같은 집에서 한겨울 배주리는 맨발의 어린 백기완, 또래들이 교복 입고 외투 입고 학교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바람부는 거리, 맨발의 소년 백기완, 단벌옷에 붉은 넥타이를 맨 장년의 백기완….
그런데 선생님이 그 널마를 입고 찾아다니시는 곳이, 세월이 이리 흘렀음에도 여전히 세찬 바람과 살을 뜯는 추위가 계속되는 곳이었다. 높은 크레인 위에서부터 광화문 광장까지. 선생님은 그 ‘널마'를 입고 노동자 살리러 가는 희망버스도 타고, 촛불집회 현장도 지켰다. 선생님이 그리 두꺼운 옷감을 고집하는 건 빈한했던 옛 시절 때문이 아니라 현재 때문이었던 것이다.
‘널마'는 품이 넓어 누구든 함께 입을 수 있고, 체구에 맞게 여며 입을 수 있다. 선생님의 ‘결핍'은 우리옷의 ‘공유' 개념과 만나 함께 나누는 ‘노나메기 정신'과 관통한다. 또 각자에 맞게 여며 입을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마무리된다. ‘공유와 열린 구조', 나는 평소 그것을 우리옷의 핵심미학이라 생각하고 옷을 디자인한다. 서양옷이 가죽가방이라면 우리옷은 보자기다. 서양옷이 옷에 몸을 맞춰야 하는 닫힌 구조라면, 우리옷은 몸에 옷을 맞추는 열린 구조이다.
지난 2월17일 서울대병원 빈소에서 진행된 고 백기완 선생 입관식 때 이기연 대표가 모시로 지은 수의를 입혀드린 뒤 마지막으로 명주 목도리를 올리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제공
지난주 <한국방송>(KBS)에서 방영된 ‘백 선생님 추모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입은 이 옷은 우리옷이야, 여러분들이 입은 건 서양거지 옷이야.”
선생님 주변에 예술가들이 많고, 선생님 자신이 시와 춤, 그림에 높은 안목이 있는 예술가였기에 알려진 일화들이 많다. 그러나 선생님이 얼마나 옷을 잘 입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사진 몇 장만 추려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봉준의 바지저고리, 김구의 짧고 검은 두루마기 이래, 우리옷의 대중적 상징화에 성공한 사람은 백기완 선생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옷은 만드는 사람 반, 입는 사람 반으로 완성시키는 옷이다. 백기완 선생은 이 시대 우리옷을 가장 탁월하게 완성시킨 ‘본보기’이다. 그는 말한다. “서양에 물들고, 자본주의에 물들고, 소비문화에 물든 옷을 벗어라. 그리고 입을수록 사람다워지는 옷을 입어라.” 우리옷을 아름답게 입는 것은 일상투쟁이다. 늘 깨어 있어야 가능하다.
2021년 2월17일, 백기완 선생님의 마지막 옷을 지었다. 무명빛, 하얀 모시 두루마기, 평소 입었던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 위에, 이 모시 두루마기를 입히고 고름을 맸다. 초록빛 대님을 매고, 명주 목도리를 매어 드렸다. ‘님을 위한 행진곡’과 통곡 속에서, 그렇게 마지막 옷을 입혀드렸다.
‘원산지 증명'을 백기완으로 할 많은 이들이 남았다. 모두 그의 아들딸들이다. 백기완 선생은 우리에게 “우리 딸이 해줍니다”라는 큰 숙제를 남기고 가셨다.
이기연/질경이 우리옷 대표·생활문화원 무봉헌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