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낮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에 설치된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장) 시민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나에게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는 여름방학의 시작과 함께 찾아왔다. 내가 소속된 학생운동단체에서 그해 겨울 대선에서 재야단체 독자후보인 ‘민중후보’ 지지 선거운동을 하기로 결정했고, 학교에서의 준비 책임이 나에게 떨어졌다. ‘여름 대선 정치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치캠프를 열고, 농촌봉사활동을 떠나는 학생들을 상대로 ‘민중 대통령’이라는 표어가 인쇄된 작업모자를 판매해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대통령 선거운동 비용과 후보기탁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여름에는 수박화채를 팔고, 겨울에는 귤도 팔고, 기념 버튼도 팔았다. 당시 나에게 중앙도서관이란 곳은 그저 방학에도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그해 내내 나는 책가방이 아니라 모금함과 유인물을 들고 중앙도서관을 찾는 날이 더 많았다.
그 고생 끝에 백기완 후보가 대학로에 설치된 높은 연단 위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사자후를 토할 때 금방이라도 새 세상이 올 것만 같았다. 대학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 중 유독 20대 초반 청년들이 많았고 백기완 후보는 그 청년들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썩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때도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에 저항하려 했고 새로운 사회를 바랐다. 정의로운 사회, 당당한 나라, 일하는 사람이 모든 사회관계에서 존중받는 시절을 원했다. 젊은 시절 우리는 그런 희망을 ‘민중권력’이라는 투박한 단어에 담아 외쳤다. 그때 백기완은 그 젊은 열정을 대변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참으로 스산했다.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백기완 민중후보에 대한 지지로 나뉘어진 학생운동진영 모두 패배의 모진 참담함을 견뎌야 했다. 선거 결과는 군사독재 후신인 민주자유당 후보의 승리였다. 스물두살 박용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한참 뒤 백기완 후보는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장작을 패는 사진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는 없었다. 정치인으로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갈 길 몰랐던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1992년 겨울과 나의 20대를 외롭지 않게 건널 수 있었던 건 가슴 뜨거웠던 사내 백기완이 추운 겨울바람을 가르는 깃발이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백기완은 92년 겨울 이전에도 그랬듯, 그 이후에도 평생을 그 뜨거운 가슴으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정치인의 길은 아니었을지언정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운동가의 단단함으로 우리들의 곁을 지켰다. 우리 사회 외로운 노동자와 소외받는 시민들이 있는 곳이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그가 함께 있었고,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망설이는 청년들에게는 용기를 갖고 앞서 나가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격려에 용기를 얻어 한걸음을 내디딘 청년들 중에 박용진도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다 한들 어느 사회나 기성세대와 기득권 세력이 쌓아 놓은 장벽 앞에 선 청년들의 불만과 불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장벽을 넘어서려는 청년들의 도전과 열정이 우리 사회를 여기까지 끌고 온 에너지이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역동성이다. 스무살 우리들이 두려워하고 망설일 때 “젊은 사람이 배짱이 있어야지! 뭐가 두려운 게야!” 하면서 의기소침해진 어깨를 후려치고 전진을 독려하던 걸쭉한 황해도 사투리의 응원이 여전히 이 시대에도 필요한 이유다. 외롭고 서러운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로하던 선생의 두루마기 도포 자락을 누가 대신할 수 있고, 청년들의 사기를 북돋아 세우던 선생의 징소리를 누가 다시 울리며 나갈 수 있겠는가마는 조금이라도 선생에게서 용기를 얻었던 이 시대 기성세대들이 있다면 선생에게 받았던 격려와 응원만큼이라도 우리 청년들에게 돌려주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힘없는 이웃들과 연대하기 위해 기득권의 높다란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선생이 앞서서 나간 자리에서 용기 있게 나서는 것이 선생의 영전 앞에 선 산 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기득권 세력에 맞설 용기를 다짐하며 다시 한번 선생님의 명복을 가슴 깊이 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강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