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보라ㅣ영화감독·작가
얼마 전 동료 예술가가 수어통역사와 함께 공연했다며 동영상 하나를 올렸다. 통역사의 표정이 생생하고 좋았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으로 시청했지만 공유할 수 없었다. 수어 통역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2020년 2월 코로나19가 확산되자 모두가 ‘코로나19 브리핑’을 숨죽여 기다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말하는 것조차 꺼릴 때, 수어통역사는 마스크를 벗었다. 수어에서 절반 이상의 의미를 차지하는 얼굴 표정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농인의 알 권리를 위해 감염 위험을 무릅쓴 통역사의 헌신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그동안 뉴스 화면 하단에 작게 존재하던 수어통역사가 화자 옆에 등장하면서 존재감을 더했고, 여러차례의 문제 제기 끝에 방송사들이 수어통역사를 화면에 잡기 시작한 것도 큰 몫을 했다. 각종 매체에 수어통역사가 등장하면서 수어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수어 통역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자 행사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인터넷과 기기만 있으면 어디서든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주관 단체가 통역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참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어·문자 통역을 도입했다. 몇몇 행사가 기술적으로 통역을 원활하게 제공하는 데 성공하자, 이를 롤모델 삼아 여러 기관에서 수어·문자 통역을 제공하며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행사’의 기준을 높였다. 장애 당사자를 비롯하여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싸워왔던 이들 덕분이다. 장애를 다루는 콘텐츠는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2020년 장혜영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정책적으로 높일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수어 통역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만 어떤 것이 질 높은 통역인지, 어느 형식과 구성으로 통역을 제공해야 하는지 한국 사회는 제대로 논의한 적이 없다. 청인 중심 세상에서 수어 통역은 종종 ‘들러리’ 혹은 ‘장식’처럼 기능한다. 통역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기도 하고, 통역 영상 크기가 작아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어통역사가 화자 옆에서 통역을 해야 하는데, 화자가 2명이라면 누가 언제 말을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2명의 통역사를 세워야 한다. 화자가 4명이라면 4명의 통역사가 있어야 한다. 동시통역은 집중력이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20~30분 간격으로 통역사를 교체해야 한다. 이처럼 통역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세세하게 기획해야 한다. 무엇보다 질 높은 통역을 할 수 있는 수어통역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수어를 사용하는 인구수에 비해 자격증을 취득한 수어통역사는 많지 않으며, 수어통역사 자격증은 단일 종류로 통역 수준을 가늠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의료·법률과 같은 전문 지식과 실력을 필요로 하는 전문 영역에 대한 자격증도 없다. 통역사의 수가 적고 자격증 체계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아 수어 통역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농인 당사자가 직접 통역의 질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더 나은 통역을 요구하면 좋겠지만 이들의 언어는 통역을 필요로 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시정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서 있지도 않다.
2020년 11월에 열린 서울인권영화제는 2명의 수어통역사를 화면 양쪽에 크게 배치하고,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청인을 화면 가운데로 몰아 작게 보여줬다. 기존 청인 중심 행사에서 수어 통역을 들러리로 세웠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획기적이고 전위적인 구성이었다. 통역의 질도 높았다. 수어 통역을 제공한다고 곧바로 ‘배리어 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농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질 높은 수어 통역을 어떻게 제공할지 고민할 때다. 통역을 잘 못해서 재미없다고, 통역이 잘 보이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농인 엄마의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