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그 결말로 훌륭한 영화 ‘미나리’ / 조이스 박

등록 2021-03-18 14:11수정 2021-03-19 12:37

조이스 박ㅣ영어교육가·에세이스트

(※이 글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훌륭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삶을 이루는 작은 것들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이 삶을 넘어서는 거대한 목적을 제시하는 이야기도 사람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는 다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드러나는 결과일 뿐이다. 이 영화는 미래의 목적을 좇아가는 것과 그걸 좇느라 소홀히 해버리기 쉬운 일상의 작은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생생히 보여주면서, 강렬히 다가왔다.

10년 동안 힘든 노동을 한 후 이제 꿈꾸던 농장을 일구어보겠다는 <미나리> 속 제이콥은 꿈의 힘으로 고된 현실을 버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마다 아내 모니카는 그 꿈을 좇느라 가족이, 일상이 무너진다고 항변한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 목적을 좇아가는 삶인가? 그 목적을 좇다가 그 과정에서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도 그 목적은 좇아갈 의미가 있는가? 목적과 과정이라는 딜레마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도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30대 초반 절박했던 시절이 기억이 났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아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 또 커리어를 망칠 수도 없었던 나를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영어밖에 없어서, 영어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면, 아래층에서 부모님과 있던 아이가 (아직 어려서) 벽을 짚고 혼자 올라오곤 했다. 아이는 내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와 내 등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끼어 앉았다. 그렇게 뒤에서 내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놀아달라 칭얼거리다가도 내가 별 반응이 없으면, 쌕쌕 숨소리를 내며 몸을 내게 딱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발딱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런데 나는 일에 빠져 아이가 지루해서 아무 소리도 없이 비척거리며 내려가도 몰랐다.

지금 뒤돌아보면, 뼈아프게 후회가 된다. 열심히 일하다 아이가 내려간 것도 모르고 있다가, ‘어? 아이가 언제 내려갔네?’ 할 때 산더미같이 밀려오는 죄책감이 기억나 뒤늦게 눈물이 난다. 수도 없이 기억이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목적을 좇아가느라 매번 과정 속의 순간들을 놓쳤어’ 그렇게 운다. 인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들 아이는 저 순간을 기억할 리도 없지만, 아이의 마음속에 평생 지니고 살아갈 온기의 만분의 일 조각씩 내가 그렇게 부족하게 만든 게 아닌가 후회가 사무친다.

<미나리> 속 제이콥과 모니카가 오버랩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목적과 과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다 어우러진다. <미나리>가 이러한 갈등만 그리다 끝났으면 평범한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가족에게 고난을 선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감히 고난에 대해 아는 척, 혹은 짐짓 초탈한 척 말하기는 싫지만, 고난은 삶을 솎아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솎아내주는 역할을 한다. 불이 나서 한 해 치 농산물이 다 타고 나서, 제이콥의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된다. 제이콥은 한 해 농사로 성공을 하고 ‘거봐, 내가 꿈은 이루어진댔지? 우리가 잘된 건 다 내 노력 덕분이야’ 하는 말을 이제 절대 하지 못할 것이고, 자기 꿈을 위해 가족을 뒷전으로 미루는 남편에게 모니카는 더는 서운함을 토로할 수가 없게 된다.

얄궂다. 산다는 것.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싶을 때, 도적같이 들이닥치는 고난을 맞이하다 보면. 잘나서 혹은 노력을 많이 해서 성공했노라 말하지 못하게 만들 힘이 있을 만큼, 고난은 신통방통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성공해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건, “감옥에서도 잘 살 수 있어요. 이게 내 삶이라면 받아들일게요” 그렇게 가석방을 영원히 포기한 순간, ‘그래, 그렇게 독기와 가시가 다 빠진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가석방될 자격이 있어!’ 하며 가석방을 시켜주는 <쇼생크 탈출>의 경우 같은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심정으로 미나리를 뜯으러 가는 걸까? 고난으로 삶이 뒷걸음질 쳐도 소중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니 이제 다시 삶을 하나하나 챙기듯 주섬주섬 미나리를 뜯으러? 이 영화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작고 평범하지만 쉽사리 죽지 않는 미나리에게 돌려보낸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