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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세계의 법칙 / 김보라

등록 2021-03-22 12:06수정 2021-03-23 02:43

김보라 ㅣ 영화감독

7살 때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갔다. 기내에서 앞서가는 부모님을 따라 비즈니스석을 지나 일반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에게 여기와 저기의 차이는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돈에 따라 저기는 더 넓고 우리는 덜 냈기에 좁은 것이라고 답했다. 나는 엄마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낸 것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기이하게 들렸다. 몇해가 지나 알게 되었다. 엄마는 농담한 것이 아니었고 세상은 정말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던 지인은 고3 때 명문대 특별반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반 아이들이 선풍기 두 대로 뜨거운 여름을 버틸 때 특별반의 아이들만 에어컨의 풍요를 누렸다며 자조했다.

친구의 아이가 몇해 전 내게 물었다. “왜 애인이 있는데 결혼을 안 해요?” 친구가 당황해서 나의 대답을 가로채며 답했다. “그건 개인의 선택이야.” 그러자 아이는 다시 힘주어 물었다. “어른은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안 해요?” 아이는 세상을 배워가고 있었다. 집안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들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구축해나갈 것이다. 갓난아이 때 만난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후, 나는 가끔 아이의 눈에서 슬픔을 본다. 그 눈에서 아이가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읽는다.

살면서 우리는 깨지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순수한 마음이 긁히고 찢겨나가는 순간들을. 아주 투명했던 마음을 짓누르듯 세계의 법칙이 들어선다. 누군가 내게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감독님, 알고 보니 정말 순수하고 솔직하세요. 사기당하실까 봐 걱정돼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진심을 내보이고 마음을 다친 적이 있었을까. 그는 나를 걱정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난날의 자신을 아파했던 것일까. 내가 친구 아이의 눈에서 ‘내 멋대로’ 슬픔을 읽었듯이.

우리는 세계의 법칙과 부정적 신념 체계들을 참이라 믿으며 자라난다. 여성과 남성은 어떠해야 하고, 공부를 잘하고 못하면 어떠하고, 가난하거나 부자가 되면 어떻게 되고 등등 끝도 없이 순진무구한 거짓들 속에 우리는 내맡겨진다. 사람들은 이러한 거짓 속에서 최대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사랑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겁에 질린 채 살아갈 때가 많다.

작가 벨 훅스는 <사랑의 모든 것>에서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요한 까닭은 거짓말이 널리 용인”되는 소비 중심적인 문화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정직한 사람은 순진해서 사회적으로 루저가 되기 쉽다고 믿기까지” 하는 이 사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진실을 말하는 문화를 재건할 필요”를 촉구한다. 어른이 되어 구태여 말하지 않는 진실은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이 사실은 사랑/사랑 없음과 연관되어 있다. 소셜 미디어의 버튼이 ‘좋아요’와 하트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인 은유다. 그러나 사랑은 “아는 것(부정적 신념 체계, 과거)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언젠가 명상 선생님에게 왜 명상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답했다. “애 둘 낳고, 어느 날 부엌에서 설거지하는데 창밖으로는 햇빛이 비치고 고요한 오후였어. 문득, 아, 내가 행복하지 않구나, 하고 느꼈어. 그리고 얼마 후에 명상센터에 등록했단다.”

탁 하고 알아차려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가짜로 하는 것들, 본질이 아닌 것들, 더는 견디기 싫은 것들이. 더는 속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이.

사랑 없음이 ‘정상’처럼 느껴지는 사회에서 내면에서만큼이라도 작은 혁명을 일으키고 싶다. 상대를 본질로서 진실하게 대하고 만나는 모두의 평화를 빈다. 비록 이 염원이 종종 실패할지라도. 이런 나를 보고 사기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저 나는 지독하게 현실적이기에 더는 거짓말을 하느라 생의 어떤 에너지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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