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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소양호 노을이 서글픈 까닭은 / 양창모

등록 2021-03-24 14:42수정 2021-03-25 02:40

양창모ㅣ강원도의 왕진의사

“할머니, 옆집에 사시는 분 있어요?” “응, 애가 하나 살아.”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깊은 골짜기. 유치원은커녕 식당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렸던 이곳에 아이가 산다는 말에 나는 되물었다. “이야, 이 산골에도 애가 있어요? 몇 살인데요?” “응, 아마 일흔 정도 됐을걸?” 이 말씀을 하신 할머니의 나이는 올해 아흔셋이다.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웃픈’ 순간도 있지만 왕진을 가는 시간 대부분은 슬픈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어르신의 삶도 슬프지만 그 어르신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은 내가 동해안으로 갈 때마다 지나쳤던 동네다. 멀리 보이는 소양호가 참 멋있었고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 동네의 모습도 ‘추억은 방울방울’ 자체였다. 그냥 그림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한 방울 한 방울 안을 들여다보면 묵직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할머니는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된 것으로 보였다. 처음 들어갈 때는 우리를 알아보고 바람도 차가운데 돌아다니느라 고생한다며 안아주기까지 하셨지만, 잠깐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어디서 왔냐고 하셨다. 그런데도 혼자 사신다. 옆집에 사는 분이 자제들의 부탁을 받고 챙겨드린다고는 하지만 혈압약을 매일 챙겨 먹는 것도 버거워서 약들이 한쪽에 먼지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약 먹는 건 하나도 없다 한다.

오후에 만난 다른 지역의 할머니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곳에 보건진료소가 있는데도 멀리 시내까지 혈압약을 타러 갔다. 보건진료소 혈압약이 안 맞아서 시내 병원까지 가신다고 했지만 진찰을 해보니 결과는 달랐다. 오히려 할머니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혈압약의 부작용으로 변비와 하지부종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을 바꿔야 했다. 다행히 대체할 약은 보건진료소에 마련해 둘 수 있는 약들 중 하나였다. 반가운 마음에 보건진료소에 전화해 약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진료소장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가져다 놓을 수는 있지만 재고 처리가 힘들어 주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할머니의 경우 매일 약을 복용하실 테니 1년 반이면 약이 다 소진되어서 재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설명까지 했지만, 진료소장은 약을 주문하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더는 설득할 수 없어서 전화를 끊고 고민 끝에 시 보건소에 전화했다. 보건진료소에 특정 약을 가져다 놓도록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해당 지역의 진료소장이 신청하지 않으면 주민이 신청할 방법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료사진 출처 : 언스플래시
자료사진 출처 : 언스플래시

할머니에게 시내에 살고 있다는 아들의 연락처를 물어보자 바빠서 전화를 받기 힘들다고 했다. 전화를 걸어봤으나 지금은 통화를 할 수 없다는 안내 멘트가 나온다. 그런 아들을 평일에 불러 약을 타러 시내까지 함께 가야 하는 마음의 짐은 어떨 것인가. 나와 진료소장처럼 차가 있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 약을 타는 것과 시내까지 가서 약을 처방받는 게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청과 무릎 관절염에 시달리는 할머니에게 그 거리는 단언컨대 쌀 두 가마니를 짊어지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청력을 거의 잃어버린 할머니는 묻는 말에 계속 “나는 몰라, 나는 몰라”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말 모르고 있는 사람은 그런 어르신들의 삶을 모른 체하는 우리들 자신이었다.

퇴근 후 답답한 마음을 안고 노을이 지는 강변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해 머리맡에 거대한 구름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서 마치 천지창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늘 다르면서도 한결같이 놀라운 하늘. 삶에서 잃어버린 것을 자연에서 되찾으려 하기 때문일까. 삶이 힘겨울수록 자연은 아름답다. 어쩌면 자연은 인간들의 삶을 안타까워하는 신이 매일매일 보내는 작은 선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그런 선물이 될 수 있기를.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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