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신자유주의 시대
혼자서도, 혼자서만 가능한
유일한 인생사는 공부뿐
동무는 각자의 독무(獨舞)가 전제되어야
제도 밖의 공동체와 도반은 지속되기 어려워
개인 내부의 융합이 가장 중요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융합의 주요 임무이기 때문
얼마 전 2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자리가 있었다. 그들의 공통 고민은 진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에요”, “그거 해서 언제 돈 벌어요”, “저는요, ‘네가 원하는 게 뭐니’, 그 질문이 제일 싫어요”… 이후 이구동성. “공산주의가 되면 좋겠어요. 고민이 너무 지겨워요.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라가 다 정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무한한 자유,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의 시대다. 하고 싶은 말이 없진 않았다. “공부를 하세요. 공부가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시대니까, 공부를 하는 거예요. 돈 안 드는 나만의 공부. 물론 입시 공부는 아니에요.”
지난달 통계청은 국내 취업 준비자를 역대 최다인 85만3천명이라고 발표했다. 더 많을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도 급증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수십년 전부터 연구가 활발했다. 신자유주의? 간단하다. 실업의 시대다. 실업과 과로사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공부, 혼자만이 가능한 삶
그들의 고민을 듣고 나름 ‘대안’을 생각하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 그는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30년 동안 매일 4㎞씩 달렸다고 한다. 통념에 기댄 그의 비유는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 얼마나 막강한지 보여준다.
머리, 즉 목 윗부분의 신체도 몸에 포함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빌린단 말인가. 잘라서? 그 누구도 타인의 머리를 빌릴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 정치 지도자의 첫번째 조건은, 현명함이다. 그래야 참모의 몸(머리)도 제대로 빌릴 수 있다. 타인의 능력이나 건강은 빌릴 수 있다. 그것은 내 몸 밖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는 빌릴 수 없다. 사람의 몸 안에는 정신과 육체가 같이 있다. 뇌는 정신이고, 팔다리는 육체인가?
위 두 가지와 비슷한 이야기. 내가 종종 겪은 일인데 전자우편으로 자료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얼마 전 내 강의를 들은 이로부터 “코로나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출처를 알려 달라”는 메일이 왔다. 나는 “특별한 출처는 없고 여러 신문을 꼼꼼히 본 다음, 기존의 내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성실히 답했다. 메일이 또 왔다. “막상 주려니까 아까운가 보죠? 정보를 독점하시네요.” 안타까운 사실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음이다. 이는 내가 김연아 선수에게 “당장 내가 점프할 수 있도록 당신 몸을 주세요”와 같은 말이다.
세 가지 이야기는 융합 개념의 핵심을 건드리는 적절한 사례이다. 코로나를 주제로 내가 강의한 내용은 현실이라는 텍스트에 근대성, 발전주의, 기후위기, 생태주의, 팬데믹, 거버넌스, 개인의 자유, 전염병의 역사, 돌봄노동 등 기존 나의 지식과 관점이 합쳐진 것이다. 나, 몸의 역사다. 개인의 몸은 그 개별성 때문에 앎의 내용과 가치관에 따라, 현실과 합쳐지는 지식의 범위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한국 사회의 인구수만큼 다른 코로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획일적 생각을 하는 큰 몸이 국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삶은 몸들의 개별적 화학이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요즘은 생사도 의료의 도움으로 외부의 개입 여지가 있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 한 가지, 공부다. 취업이 안 되는 시대라면, 공부를 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 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공부는 내 몸이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 쇳물, 망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해, 기(技)와 예(藝)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개체다. 사랑하는 이가 아플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입시 코디’를 고용해도 안 되는 공부는 안 되는 거다. 그 어떤 경우에도 별도의 몸인 타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폭력과 고문이 인문학(humanities)의 주된 주제여야 하는 이유다.
공동체와 도반의 지속가능성
주변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공부처럼 좋은 예도 없을 것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 행운이 없다.
공동체와 도반(道伴)은 함께 공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두 가지 모두, 제도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학교와 배타적인 연애, 가족제도는 대표적인 제도권 안에서의 공부 모임이다.
반면, 각자가 조직하고 참여하는 온/오프 공부 모임이나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두 사람만의 관계가 있다. 도반은 두 사람이어야 한다. 세 사람이면 대화가 흩어진다. 공부에 필요한 적대는 1:1의 관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1:1 관계가 ‘유사 연애’를 띠는 이유는 둘 사이에 검열 없는 대화, 상대방의 뇌를 출/입할 수 있는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권 밖의 공동체와 도반. 외로운 우리는 단어만으로도 힐링이 된다(‘사이비 종교’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공부 공동체를 ‘교회’, 쉼터, 가족, 도피처로 착각할 때, 공부 외에 다른 일로 골치가 아파진다. 무임승차, 인간관계 갈등, 성별 분업, 리더십 문제… 외부로부터는 “패거리”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도반은 배신과 치정, 경쟁 관계가 변질되거나 처음부터 세속적 단짝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많다.
학교, 가족, 이성애 제도는 제도가 관계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 덜 요구된다. 제도적 관계는 제도가 관계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개인에게 특별한 노력이 필요치 않다. 흔히 생각하듯, 개인이 공동체나 도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개인이 열심히 공부할 때만, 즉 스스로 융합을 멈추지 않을 때 관계는 지속된다. 모여서 융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개인 내부의 융합이 있어야 외부와 ‘함께’가 가능하다.
동무(同舞)는 독무(獨舞)가 전제되어야 하고, 운이 좋으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 많은 이들이 융합의 어감 때문에 무엇인가가 합해진다고 생각한다.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만의 몸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 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영원한 사랑, 지속가능한 도반, 헌신할 만한 조직과 결합되어 내 몸이 확장된다면, 인생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랴. 그러나 대부분은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1967), 프랑스 영화 <이웃집 여인>(1981)처럼, 총으로 상징되는 제도를 이기지 못한다. 영원한 사랑(도반)이 있긴 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유지가 어렵다. 계속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질 급한 이들은 혼자 득도하는 쪽을 택한다. 상대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때, 남는 것은 노동뿐이다.
그래서 상대를 ‘버리는데’, 그 이유를 아는 상대도 있고 모르는 이도 있다. 혼자 남겨진 ‘을’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융합하는 상대방의 몸(mindful body)에 집착한다. 대개 치정으로 간주되지만, 그냥 한쪽의 불성실이다. 불성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성실한 삶이 어렵기 때문이다. 길동무가 지속되려면, 각자 보조가 맞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매우 매우 매우’ 드물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친구로 남자”는 대화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융합은 내 몸에서 먼저, 공동체나 도반에서는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다. 혼자 공부하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한다. 굶으면서 공부할 수는 없지만, 최소 비용으로 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적 인프라의 문제다. 걸을 수 있는 거리면 좋고, 아니라면 몇천원의 교통비와 주민증을 가지고 큰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가방도 필요 없다. 읽고 조사하고 필요한 부분은 본인 메일로 보낸다. 이런 방식의 공부를 권한다. 누구든 어느 한 가지에도 관심 없는 이는 없다. 본인의 생계를 전문적 지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스스로 융합된 몸이 되어야 다른 융합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 지속적인 생산이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는 공동체나 도반이 무슨 소용인가.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