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4일 강경대 열사 장례식은 ‘6인 분신 합동 추모제’와 함께 국민대회로 열렸다.
장석준ㅣ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올해는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다. ‘5월’ 투쟁이라 하지만, 발단인 강경대 열사의 무참한 죽음은 4월26일에 일어났다. 실은 ‘5월 투쟁’도 합의된 명칭은 아니다. 여전히 ‘분신 정국’이라 부르는 이도 많다. 그 정도로 5월 투쟁의 기억은 불과 4년 먼저 있었던 6월 항쟁에 비하면 어둡고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잊어도 좋은 사건은 결코 아니다. 5월 투쟁은 6월 항쟁의 공식 역사가 흔히 생략하고 넘어가는 그 한계와 공백에 대한 격렬한 문제제기였다. 군부독재 잔재에 항의하는 학생들과 민주노동조합 탄압에 파업으로 맞선 노동자들을 통해 5월 투쟁은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하나로 아우르며 끓어올랐다.
그럼에도 5월 투쟁은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리된 이유로 투쟁세력의 한계나 오류를 들기도 하고, 유서 대필 조작 사건 같은 정권의 모략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6월 항쟁으로 등장해 지금껏 이어지는 정치 질서, 제6공화국 체제였다.
1987년 개헌으로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고, 더불어 국회의원 선거제도도 소선거구 중심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3김 정치인의 지역주의 활용 전략에 따라 다당 구도가 등장했지만, 이는 3당 합당을 통해 곧바로 양당 구도로 바뀌었다. 오늘날까지 우리 정치를 지배하는 양대 정당 중심 구도가 들어선 것이다. 이때는 이것이 군부 잔당과 손잡은 김영삼이냐 아니면 김대중이냐는 선택지로 나타났고, 대다수 시민은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이 양자택일로 치환했다. 그래서 거리에 자욱했던 최루가스가 채 가시기도 전에 6월 광역의원 선거 정국이 열리게 된다.
그럼 그때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있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1991년 5월 투쟁의 운명이 제6공화국 30여년 역사 속에서 이후 수차례 반복됐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5월 투쟁의 가장 커다란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는 제6공화국에서 대중의 외침이 항상 어떤 무한 순환에 빠지게 될지 보여준 첫번째 사건이었다.
두번째 사건은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에 맞선 1996~1997년 총파업이었다. 5년 전처럼 다수 시민이 지지하고 참여한 항쟁이었는데, 결말 또한 5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결판은 그해 말 대선에서 보는 것으로 미뤄졌고, 그렇게 하여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노동법 개악을 그대로 다시 밀어붙였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어떠했는가. 시위 규모는 더욱 커졌지만, 이때야말로 돌파구를 찾기 가장 힘들었다. 대통령 임기는 4년 넘게 남아 있었고, 국회는 범여권이 다수였다. ‘진보’ 시민사회는 민주-진보파가 대동단결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는 길밖에 없다고 되뇌었고, 촛불시위에 등장했던 참신한 문제의식이나 상상력은 그새 다 망각되고 말았다.
2016~2017년 촛불항쟁이라고 다를 게 있는가. 시민들의 외침이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져 과거와는 다른 ‘승리’의 느낌을 안겨주었지만, 촛불광장의 열망과 기대는 이후 세차례 선거에서 양대 정당 중 하나에 고스란히 위임되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난 30여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정체냐 퇴행이냐는 양자택일에 갇힌 채 불과 몇년 전의 그 거리와 광장을 쓰디쓰게 돌아볼 뿐이다.
한두번은 비극이라지만 30여년간 이렇게 반복했다면 이제는 전혀 다른 선택을 감행할 때다. 무한 순환의 운명을 강요하는 제6공화국의 구성 요소들, 대통령제, 승자독식 선거제도, 엘리트 중심 정당제도 등을 모조리 회의와 파괴, 재창조의 용광로에 쏟아부어야 한다. 이 용광로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앉아서 그저 녹슬어가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