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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비정규 노동 수기] 계약직을 전전하다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상) / 박미리

등록 2021-04-07 17:33수정 2022-02-10 12:52

집에 와서 씻으려고 하니 콧속에 시커먼 먼지가 풀어도 풀어도 계속 나온다. 손과 팔에는 벌겋게 긁힌 자국들이 보이고 그제야 쓰라려 온다. 트럭에 오를 때 박은 건지 레일을 밀다가 찍힌 건지 무릎은 온통 멍투성이다.

박미리ㅣ사회복지대학원 석사과정

당시는 대학 졸업 뒤 무직자였고, 지금은 대학원생이다. 한때 택배 현장에서 여성을 만나는 일이 흔하진 않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택배를 선택해야 했고, 이후로도 몇차례 더 시도했지만 차량 없이는 어려워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기해야 했다. 2019년 초여름 울산이었다. 이후로 적지 않은 이들이 택배일로 목숨을 잃었다. 여전히 택배 대란이 발생한다. 내 기억을 일기로만 묻히고 싶지 않았다. 노동 여건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때의 기억과 비애, 쓴웃음과 각오를 나누고 싶다. 나부터 그때의 비애와 쓴웃음, 각오를 잊고 싶지 않다.

“♬♬♬♬♩”

“자기야, 오늘도 신나는 하루 되세요. 다니엘이 응원합니다.”

새벽 3시40분, 친구의 강다니엘 알람 소리에 잠이 깬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기 싫도록 찬 공기가 나를 감싼다. 세안 후 선크림까지만 바르고 10분 만에 주섬주섬 간식을 챙겨 집을 나선다. 새벽이라 도로가 휑하다. 물류센터는 차 타고 30분 거리 외곽에 있다. 시작은 4시45분인데, 4시30분까지 미리 와서 준비하라고 했다.

백수 10개월차, 조급한 마음에 속이 타들어가던 중, 3개월째 새벽 택배 알바를 하고 있는 친구의 추천으로 택배를 시작하기로 했다. 버스가 안 다니는 어두운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데 나는 운전을 못해서 친구 집에서 자고 같이 출발한 것이다.

1일차, 긴장된다. 내 작은 손에 맞지 않는 빨간 반코팅 목장갑을 지급받아 자리를 배정받았다. 친구 소개로 와서 그런지 업무도 다시 가르쳐주지 않는다. 전날 미리 들어두긴 했지만 당황스럽다. 다행히 업무는 어렵지 않다. 뒤에 있는 택배 트럭에 붙은 종이의 ‘A, B, C, 102A’ 따위의 코드를 기억했다가 앞에 있는 레일 컨베이어로 밀려오는 택배물 중 맡은 코드를 골라 트럭 안에 분류해서 쌓으면 된다. 차 한대당 코드가 4~8개 정도 되고 세 트럭을 각자가 책임져야 하니 체력과 순발력은 물론 시력도 좋아야 한다.

50분 일하고 10분에서 15분 쉰다고 했지만 말이 그런 거지 실제 쉬는 시간은 통합물류센터에서 온 트럭 한대의 물량이 모두 내려지고 다음 물류 트럭이 올 때까지의 시간을 말했다. 그마저도 이전 택배가 밀릴 때 정신없이 내렸던 박스를 정리하다 보면 10분이 지나 있었다. 트럭 안까지 오르내리기를 수백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뻘뻘 난다. 곧 숨쉬기가 가빠져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붙인다.

그렇게 다섯 시간 삼십 분, 어느새 해가 뜨고 10시15분이 되어 있다. 시간이 정말 총알 같다. 오전 중에 이만 보를 넘겼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한편으론 아침 운동을 한 듯이 개운하기도 하다. 일을 마무리 짓고 한장짜리 일용직용 단기근로계약서를 쓴다. 쉬는 시간 30분을 뺀 다섯 시간의 임금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출근도 15분 일찍 했는데, 쉬는 시간을 포함해 내가 현장에서 머문 45분과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은 무시된 다섯 시간이다. 사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와서 씻으려고 하니 콧속에 시커먼 먼지가 풀어도 풀어도 계속 나온다. 손과 팔에는 벌겋게 긁힌 자국들이 보이고 그제야 쓰라려 온다. 트럭에 오를 때 박은 건지 레일을 밀다가 찍힌 건지 무릎은 온통 멍투성이다. 체력에 자신 있었는데 녹다운된 나 자신이 초라하다. 나는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라 쉽게 봤는데 자존심도 상한다.

복잡한 마음이지만 깊은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씻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자고 일어나니 오후 3시다. 몹시 허기가 져 마구 먹어댔다. 백수 되고 신경성 위염과 장염 때문에 소식해야 했는데 많이 들어간다. 일 시작 하루 만에 위장염도 낫고 식욕이 돌아왔다. 속이 편안한 걸 보니 위장염은 신경성이 아니라 운동 부족 탓이었나 보다. 매일 아무 데도 안 가고 방에 쪼그리고 앉아 취업 실패로 좌절하여 훌쩍이고 있었으니 위장이 쪼그라들어 있었을 거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 못 할 것 같았는데, 한숨 자고 밥 먹고 나니 내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새벽일의 장점이라면 일 마치고 낮잠 자고 식사하고도 아직 훤한 대낮인 것이다. 덕분에 강제로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코로나19 시대, 인간 생활의 기본요소는 ‘의·식·주’가 아니라 ‘의·식·주·배(달)’가 되었다. 이번 노동수기(상·하편)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성이 보내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통해서다. 숱한 노동세계의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처지, 취재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노동 당사자의 글로 공유했던 노동수기 1부를 비정기적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자신의 경험을 새긴 ‘노동일기’는 14매 또는 28매 분량으로 opinion@hani.co.kr로 투고해주시면 선별 게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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