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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15.1% / 서한나

등록 2021-04-11 13:55수정 2021-04-12 02:05

서한나 ㅣ 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서울시장 선거를 보면서 나는 ‘하루만 네 방의 침대가 되’듯 투표 날 하루만 서울시민이 되고 싶었다.

아파트 상가의 벽에서 낙서를 본 적이 있다. 색연필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 상가가 낡았을수록, 글씨가 작아서 누가 보겠어 싶을수록 내 가슴은 웅장해졌다.

20대 여성 15.1%가 ‘기타’ 정당에 투표했다. 같은 세대 남성의 5.2%, 다른 세대에서는 0.4%에서 5.7%만이 군소정당에 투표했다. 이 숫자는 집계된 모든 세대에서 유일하다. 나는 선거 전 군소정당 후보자 토론회를 유튜브 라이브로 보면서 시청자들이 뭐라고 채팅을 해대는지 지켜봤다.

그중 하나가 “세계관 최강자들이 모였네” 하고 말했다. 비아냥조였지만 뒷걸음치다 맞는 말을 한 격이었다. 여성의당 김진아 후보가 내건 공약처럼 세상이 바뀐다면 서울로 이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지도 모르고 원해왔지만 어떤 정치인도 말하지 않았던 것, 그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울에 여자만 사는 줄 알겠네” 조롱하지만 정치는 자원의 분배다. 같은 시민이지만 권력 유무에 따라 자원의 분배에서 교묘하게 소외되는 계층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 자원을 예리하게 분배해내는 자질은 정치인에게 필수다. 여성의당 김진아 후보가 내건 “SH 공공주택분양 50% 여성세대주 의무할당”은 그런 점에서 탁월한 공약이다.

우리에게는 세계관 최강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세상엔 이간질이라는 게 존재한다. A 뽑지 마, 어차피 B가 될 텐데, A를 뽑으면 네 표는 사표가 될 거야. C를 뽑으면 D가 될 거야… 최악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그 목소리는 유혹적이지만, 1+1은 2다. A에게 표를 주면 A가 된다. 우리에게는 또한 차악이 아닌 최선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 한 명의 시장이 그것을 보여주면, 다른 지자체는 선례를 따라온다. 세상은 그렇게 바뀐다.

이번 보궐선거가 집권당 소속 정치인의 연이은 권력형 성범죄의 결과로 치러졌고 여기에 세금 824억원이 쓰였다는 것을 기억할 때 20대 여자를 뺀 나머지 계층의 투표 결과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왜 뽑는가? 반대로, 왜 안 뽑는가?

이번 선거는 성차별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당이 수세에 몰렸을 때만 여성 후보를 내세우는 ‘유리절벽’은 박영선이 후보가 된 이유를 말해준다. 나경원이 후보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반대다. 이 모든 걸 지켜보는 20대 여성. 불법촬영 시위하고 각종 성범죄, 스토킹범죄 국민청원 하고 유리절벽이든 천장이든 지적하고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비혼과 비혼 공동체를 이야기하며 자구책을 찾는, 청년 세대의 갈 곳 없음과 여성차별의 이중고를 겪으며 시민이 된 이들.

60세 이상 남성 70.2%, 여성 73.3%가 오세훈에게 투표했다. 20대 남성도 72.5%로 이와 비슷한 투표율을 보였다. 정치인들이 우경화된 20대 남성의 눈치를 보는 동안 20대 여성은 무시당하고 있었다. 가임기 여성으로만 재현되거나 아예 재현되지 않는 식이었다. 15.1%는 다른 세상을 달라는 선언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비혼이 대두된 배경을 들여다보지 않고 “애는 누가 낳냐” 물은 결과 투표율은 세대와 성별로 유의미하게 갈렸다. 선택지 없음의 고문 끝에 정치적 지향에 부합하는 후보를 갖게 된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생각하는 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대 여성이 곧 20대가 될 거라는 것이다. 젊은 여성은 계속해서 정치의 주체로 살아가며 나이 들 것이다. 정치가 잘못될 때 타격받는 사람은 정치를 알게 된다. 우리는 너무 오래 무시당해왔다. 같은 이유로 이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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