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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손석우의 바람] 봄비가 반가운 숲

등록 2021-04-11 16:51수정 2021-04-12 02:05

손석우 ㅣ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비 오는 주말 우연찮게 시를 읽었다. “비가 봄꽃들을 안아내려 온통 꽃길이다. (중략) 마음에 비 내려도 봄길처럼 꽃을 품으면 꽃길이 되는 줄을 이 아침, 향기로운 꽃길을 걸으며 처음 알았다. 가시 대신 꽃을 품으면 너도나도 이제 꽃길을 걷겠구나.”(김이수 작) 이틀간 내린 봄비로 힘없이 흩어진 꽃. 꽃으로 어수선한 길에서 시인은 희망을 보고 있었다.

봄비는 사실 반가운 손님이다. 오래전 농경사회에서 봄비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쌀을 주식으로 삼는 아시아에서 논을 채울 수 있는 최소한의 빗물은 생존의 문제였다. 단군신화를 기억하는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환웅은 세명의 신을 데리고 왔다. 바람의 신 ‘풍백’, 구름의 신 ‘운사’, 비의 신 ‘우사’. 흥미롭게도 모두 날씨를 관장한 신이었다. 물론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도 비와 폭풍우와 천둥의 신이었다. 북유럽의 토르도 천둥과 번개를 다루는 신이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신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신들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신들이었다. 그것도 단 세명으로 구성된 소박하고 단출한 신들.

봄비가 반가운 또 다른 이유는 미세먼지를 씻어내기 때문이다. 공장이 세워지고 자동차가 다니기 오래전부터, 한반도는 봄마다 미세먼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름 아닌 황사와 꽃가루 때문이다. 통제가 불가능한 봄철 대표적인 미세먼지다. 지난달 말 강력한 황사가 한반도를 덮쳤다. 일부 지역에서는 미세먼지 농도가 1000마이크로그램을 넘어섰다. 사실상 실외 활동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봄비는 이런 황사를 씻어내는 반가운 손님이다. 꽃가루도 마찬가지다. 알레르기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비 갠 뒤 꽃가루가 없어진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조금만 교외로 나서면 봄비가 내린 뒤 노랗게 거리를 뒤덮은 송홧가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봄비가 반가운 곳은 숲이다. 유난히 눈이 적은 겨울을 난 숲은 종종 매우 건조해진다. 봄비마저 없다면 숲은 작은 불씨로도 쉽게 파괴될 수 있다. 봄철 유독 산불이 많은 이유다.

2005년 봄 양양 산불. 유년 시절 수학여행을 갔던 관동팔경 낙산사가 전소되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일은 식목일이었다. 그보다 5년 전에는 더 큰 산불이 있었다. 역대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2000년 4월 고성·강릉 산불은 동해와 삼척을 거쳐 5개 시·군으로 번져 여의도 면적의 80배가 넘는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2002년 청양·예산 산불, 2005년 양양 산불, 2013년 포항·울주 산불, 2017년 삼척·강릉 산불, 2019년 고성·속초 산불. 모두 봄비가 절실했던 봄에 발생했다.

봄비는 특히 동해안에 중요하다. 2000년 이후 발생한 재난성 산불은 주로 동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강릉, 동해, 삼척, 속초, 고성, 양양에서 빈번했다. 다름 아닌 이 지역에 발달하는 양간지풍 때문이다. 양간지풍은 양양과 고성(과거 지명 간성) 사이에 부는 강한 바람을 일컫는다. 양양과 강릉 사이에 부는 경우 ‘양강지풍’이라고도 부른다. 북쪽에 저기압이 남쪽에 고기압이 위치하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 생긴다. 이때 태백산맥 서쪽의 대기가 안정되면, 바람은 하층의 영향 없이 산맥 동쪽 평지를 향해 폭포처럼 강하게 불게 된다. 특히 산맥 사이의 좁은 공간을 압축해 지나가면 거의 소형 태풍급 강풍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산불이 급격히 퍼지게 된다. 산불 감시를 위해 바람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오늘도 전국 곳곳에 건조주의보가 발령되어 있다. 다행히 산불이 빈번했던 동해안 지역은 특보가 발령되지 않았다. 주초에 예보된 봄비가 숲을 충분히 적시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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