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ㅣ 법조팀장
최순화(56)씨는 어렵게 입을 뗐다. 그날의 공기, 바람, 아들의 표정…. 그는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날,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남편과 일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엄마, 저 친구한테 옷 빌리러 가도 돼요?” 아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일터에서 돌아와 아들을 나무랐다. 늦은 시각에 무슨 옷을 빌리러 가느냐고. 남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아침에 최씨는 아들을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줬다. 풀 죽은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다녀올게요.” 여행가방을 든 아들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아들은 이창현군이다. 2014년 4월15일 수학여행을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다. 이군은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이었다. 엄마는 세월호 참사로 아이와 화해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날 밤, 창현이가 다른 학교 친구한테 빌린 옷이 뭔지 아세요?” 지난해 4월 마주한 최씨가 말했다. “아디다스 운동복이었어요. 삼선이 그려진….” 그 옷을 사줬더라면, 그날 웃으며 손을 흔들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엄마는 날마다 혼자서 싸우고 있었다.
같은 학교 문지성양도 수학여행 전날, 집에 놀러 온 언니 친구에게 삼선 운동복 상의를 빌렸다. 하의는 남동생 것을 빌려 입고 갔다. 상의는 붉은색, 하의는 검은색이었다. 옷은 끝내 주인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안명미(58)씨는 딸이 돌려주지 못한 옷과 똑같은 옷을 사서 딸 친구 손에 쥐여줬다. 정작 아이에겐 사주지 못한 옷이었다.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옷을 빌려서 수학여행 길에 오른 아이들의 마음을 떠올리는 일은 무참하다. 이 옷에는 아이들의 ‘소망’과 ‘이해’가 담겨 있다. 입고 싶은 옷이었지만, 아이들은 부모한테 이 옷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상처뿐인 부모의 마음을 더욱 짓누른다.
박시찬군도 그런 아들이었다. 시찬이는 누나의 삼선 운동복을 빌려 갔다. 여행 전날, 그는 용돈으로 7만원을 받았다. “이 돈을 다 가져가면 모두 쓰게 될 것 같다”며 2만원은 집에 두고, 5만원만 들고 갔다. 세월호 참사 뒤 20일 만에 돌아온 시찬이의 지갑에는 이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뭐라도 사 먹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돈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대로.” 아빠 박요섭(53)씨는 비통해했다. 창현이와 지성이의 지갑도 다르지 않았다. 물에 젖어 돌아온 돈을 얘기하며, 부모들은 또 무너져 내렸다. 수년이 지났지만 달라질 수 없는 마음이다. 시찬이 누나는 그 돈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잊지 않으려고, 동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라도 더 갖고 싶다고, 딸은 아빠에게 말했다.
별이 된 아이들과 그의 가족들은 저마다 특별한 이야기를 안고 있다. 그것은 고통과 통곡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없는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6일로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지만, 여전히 진실은 수면 아래에 잠겨 있고, 책임자 처벌은 요원하다. ‘촛불정부’가 저물어 가는데도 달라진 게 없다. 부모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고 있다. 이들이 지난 7년을 버텨온 원동력은 하나다. 자신의 삶에 충만한 기쁨을 준 아이들을 늘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와 같이 노래해요. 함께 밥도 먹고, 함께 여행도 가고. 항상 같이 있으니까.” 최순화씨의 말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배웠다.
좋아하는 노래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박요섭씨는 그룹 부활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꼽았다. 아빠로서의 ‘소원’과 어른으로서의 ‘미안함’이 노랫말에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다시, 봄이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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