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꿀 한통을 얻으려면 지구가 필요하다

등록 2021-04-27 04:59수정 2021-04-28 10:20

정희진의 융합 _22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꿀벌의 꽃가루받이 활동은
지구 전체 생태계와 관련

글로벌 자본주의 ‘주인공’
금융에서 자연으로 전환해야

자본주의 원리를 최종 상품 아닌
생명의 생성 과정으로 사유하면
기본소득은 부의 재분배가 아닌
지구의 성원, 사회적 존재의 권리

이 연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쉽고 재미있고 시사적이면서도 새로운 개념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물론 망상. 당연히 나는 그렇게 쓸 수 없었다. 내 능력이 가장 문제지만, 독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래서, 도대체 융합이 무엇인가요?”였다. 개념을 정리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나의 공부(글쓰기) 방식은 기존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글을 쓸 때 일단 소재에 관한 통념 목록을 최대한 만들어놓고, 그 부분은 소거한 후 그 외의 것을 쓴다.

하지만 이쯤에서 융합에 대한 ‘요약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융합의 뜻은 각기 다르다. 개념이 다르다는 의미는, 융합에 접근하는 방식과 이유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다양한 융합 개념을 세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 융합은 원래부터 앎이 이루어지는 원리였다. 어떤 지식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화학과 화학공학, 정치학과 사회학, 수학과 전산학 같은 ‘근접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의 기원은 없다. 그러므로 융합이란 무엇인가를 따로 질문할 필요가 없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 혼종(混種), 혼합(混合)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학문 간 대화와 다학제 연구를 촉구하는 융합이 필요하다. 이견이나 ‘틀린 말’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재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덜(?)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로 모시는 인물에게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감히~”). 이른바 전문가주의라고 불리지만,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지름길이다. 심리학(프로이트), 사회학(베버), 정치학(모건소)… 이들의 이론도 인용과 참조의 누적, 지역의 산물인데, 경전으로 받들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그냥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면 된다.

나 역시 여성주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보부아르, 스피박, 버틀러의 논의는 분단 한국, 식민지 남성성을 설명할 수 없고 그들도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없다. 페미니즘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한 번에 설명하겠다’는 거대 서사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은 자신이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언어’다.

셋째, 융합은 위 두 가지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지향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지식, 새롭지 않은 융합이 왜 필요할까? 당파성과 가치관이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앎은 현실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단을 위한 융합이냐가 핵심이다. 같은 학과에서도 정반대의 입장이 존재한다. 융합은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문제다. 융합의 전제는 지식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융합은 그 과정도 결과도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요약. 융합은 원래 존재했다(hybridity), 대화가 필요하다(learning),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trans~). 물론,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경제학의 예를 들어보자.

인류세의 도래

홀로코스트, 사회주의권의 해체(전지구적 자본주의화), 팬데믹. 지난 백년간 인류가 만든 가장 결정적인 역사가 아닐까. 1·2차 세계대전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곳곳의 국지전들은 이들 사건의 연속선, 여파이다. 모두, 근대에 이르러 지구의 주인공을 자처한 인간의 의지가 낳은 비극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급기야 인류세(人類世)가 도래했다. 199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네덜란드의 파울 크뤼천이 2000년도에 제안한 ‘인류세’는 지질시대 최후이자 현세인 충적세(沖積世)에 이어, 인간의 환경 파괴로 지구의 지질이 변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지구의 역사를 45억년으로 추정할 때, 불과 100~200년 만에 인간이 저지른 일이다. 인간의 능력은 잠자리 촉각의 10분의 1, 개 후각의 36분의 1, 부엉이 시각의 5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떻게 지구의 지질을 변화시킬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생각하는 능력, 도구를 만드는 능력? 아니다. 생각을 잘못한 탓이다.

극단의 빈부 격차와 기후위기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플라스틱 생수병을 내장에 지닌 채 썩어가던 물고기가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삶의 방식, 문명의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의 관심사는 주식 열풍, 부동산, 비트코인, ‘보복소비’에 있다. 경제학은 왜 필요한가. 근대경제학을 주류경제학과 정치경제학으로 나누지만, 우리에겐 요원한 일이다. 한국만큼 경제학이 좁은 의미로 쓰이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심지어 예전에는 상당히 많은 대학에서 경제학이 사회과학대학이 아니라, 상과(商科)대학 소속으로 경영학과와 비슷하게 인식되었다.

본디 경제학(eco/nomics)은 ‘패러다임’과 비슷한 의미로서 삶의 전반적인 생태계, 체계, 환경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 얀 물리에부탕(1949~)의 <꽃가루받이 경제학>(돌베개, 2021)은 대안적인 글로벌 경제를 제안한다. 사실 그의 이론은, 많은 남성 지식인들이 본인이 인식하든 안 하든 간에, 여성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이미 여성주의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 아니라 인지, 지식, 돌봄, 감정 노동 등 ‘보이지 않는 마음(heart)’이라고 주장해왔다.

부탕의 아이디어도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그는 꿀을 예로 들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거꾸로 쓴다. 최종 상품으로서 꿀 그리고 꿀을 파는 회사, 금융, 주식이 아니라 최초 생산과정인 ‘벌과 꽃가루’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재해석한다.

기본소득은 지구 구성원의 권리

꿀벌이 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꽃가루받이가 필수적이다. 꽃가루받이는 꿀벌이 꽃가루, 화분(花粉)을 모으면서 수술의 꽃밥 속 암술머리로 옮겨주는 일이다. 꽃가루받이는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산하지 않지만, 생명이 번식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생명의 촉진자로서, 꿀뿐 아니라 생태계와 생명체를 생산한다. 꽃가루받이는 ‘사고파는 거래’가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호 기여 행위’를 이끌어내는 복합적인 공생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꿀벌의 꽃가루받이는 채소와 과일 생산의 거의 80%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또한 야생식물의 생식에도 큰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꿀이 생산되려면 지구 환경의 모든 과정이 필요하고 관련되어 있다(앞의 부탕의 책, 126쪽).

시오니즘계 다국적기업인 네슬레가 꿀 대신 설탕물을 판매한다 해도, 인류의 모든 활동은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마스크를 벗고 싶은 간절한 마음!). 팬데믹을 “자연의 역습”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여전히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키는 관점이다. 인간은 자연의 극히 일부분이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든 이용하든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 자연은 인간과 같은 ‘급’이 아니다.

경제학은 기업 경영을 ‘뒷받침하는’ 회계(會計)의 일부가 아니다. 경제학을 금융, 실물경제, 국가 예산 등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면, 일부 경제전문가처럼 기본소득을 “악성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게 된다. 아니, 비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진정 걱정하고 있는 듯하다. 극도로 좁은 시야의 경제학은 공동체의 발목을 잡는 데 동원되기 쉽다.

꿀벌의 꽃가루받이 활동은 자연 전체를 포괄하는 경제활동으로서, 누구도 지구의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생의 원리를 일깨워준다. 여기서 기본소득의 당위가 나온다. 기본소득은 인간이 지구의 일원으로서, 환경의 일부로서 누구나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와 같다. 기본소득은 지구 전체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생명 자체의 권리이다. 기본소득은 자본 중심이 아니라 자연 중심 글로벌주의의 일례다.

대개 기본소득을 부의 재분배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적 관계 속 존재 자체에 대한 대가다. 물론 그 액수는 사회마다, 구성원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의 경제활동을 ‘노동’보다 ‘기여분’으로 논의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임금노동자의 ‘억울함’은 사회 전체의 부를 나눔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횡포, 금융자본의 ‘장난’으로 인한 것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허경영씨의 말대로 “파도는 반드시 물에 의지해야만 가능하고,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을 뿐”이다.

정희진 |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