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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풍선 속에서 사는 노인 / 양창모

등록 2021-04-28 14:22수정 2021-04-29 02:38

| 양창모 강원도의 왕진의사

나이가 들면 몸이 감옥이 된다. 몸이 아파지기 시작하면, 어떤 나이가 지나면 신은 세상이라는 풍선에 공기를 불어넣는다. 우주가 팽창하 듯 노년의 세계는 한없이 팽창한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사물은 점점 멀어진다. “보건지소 가려면 버스 타러 저 큰길까지 걸어나가야 하는데 세 번 네 번을 쉬었다 가야 해.” 왕진 가서 만난 할머니가 가리킨 손끝에는 큰길의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나에게 100미터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저 길이 할머니에게는 몇 미터로 보일까. 얼마나 멀까. 오늘 10분이면 걸어갔던 곳을 한달 후에는 갈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나도 언젠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면 한없이 팽창하는 세상을 마주할 것이다.

할머니와 같은 시골 어르신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생각했던 것이 있다. 왜 어르신들은 저리 힘든 몸을 하고 버스를 갈아타며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가. 면 소재지에 덜렁 하나 있는 보건지소는 너무 멀고 가까운 보건진료소에는 필요한 약이 없다. 그러니 힘들어도 시내로 나간다.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한달에 한번이라도 정기적으로 의사가 찾아와서 ‘마을진료소’를 연다면 어떨까. 처방된 약을 마을 활동가의 도움으로 조제해올 수 있다면 어르신들의 고행길은 끝날 것이다. 마을진료소를 추진해주는 지자체장 한 사람만 있으면 첫번째 마을진료소가 시작될 수 있다. 그러면 마을진료소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갈 것이다.

의료는 공급이 수요를 발견해내는 특이한 영역이다. 시골 노인들에게 어떤 의료서비스가 필요한지는 노인들 본인도 모를 수 있다. 아니 대개는 모른다. 의료진과 행정가들이 와서 접촉을 해야 필요한 의료의 수요가 발견된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런 만남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접촉이 일어나지 않았던 걸까? 노인이고 시골이고 가난하고 여성이고 1인가구인 사람, 거기에 차가 없고 몸이 불편해서 이동이 어려운 사람에게 한국 사회가 결코 마이크를 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허리가 기역 자로 꼬부라져도 보건소를 찾아가는 법이 없는 이분들은 마치 투표장에 오지 않는 유권자와 같다. 이것이 정치의 영역이라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포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의료라는 복지의 영역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특히 그들이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적게 대표되고 있다. 행정은 이렇게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필요와 요구를 적정하게 대표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공공의료기관이 해야 할 역할이다. 풍선처럼 부풀어가는 노년의 세계에 공기를 불어넣는 것은 신이 아니라 행정의 무관심이다.

지난 겨울. 강에는 거대한 혹등고래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영하 20도 가까이 내려간 세상. 마침내 얼어붙은 수면 아래에서 강은 자신의 소리를 세상 밖으로 토해냈다.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기나긴 고래 뱃속을 통과해 나오는 것 같기도 한 소리들이 저 멀리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다가와 다리 너머로 사라져 갔다. 강 속에 거대한 고래가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였다. 왕진을 가면서 나는 다시 얼어붙은 세상을 마주한다.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아도 어르신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 사거리. 약국과 병원은 죄다 모여 있는 6차선 도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뒤뚱거리며 그곳 횡단보도를 바쁘게 건너가던 노인들. 왜 저럴까 싶게 가끔은 위태롭게 도로를 무단횡단하던 모습이 실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듣지 못했다.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듣지 않았던 것이다. 얼음 아래 강물이 이리로 저리로 휩쓸려가며 소리를 내듯 하루 몇번 오지 않는, 놓치면 안 되는 버스를 놓칠까 봐 죽기 살기로 우르르 몰려가던 시골 노인들의 모습. 그 소리를 나는 이제야 들은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공공의료가 그 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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