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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관음충과 철학의 침묵 / 김우재

등록 2021-05-04 04:59수정 2021-05-04 07:54

| 김우재 낯선 과학자

마누엘 데란다는 뉴욕에 거주하는 예술가 겸 철학자다. 미술로 학사 학위를,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프린스턴대 등에서 주로 도시의 역사와 역동성에 대해 강의한다. 주로 예술에 대한 철학서들을 저술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질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 이론에 탐닉하면서, 현대 과학이 다루는 자기조직성, 인공생명, 비선형 동역학 등을 그의 이론에 끌어들이는 중이다. 최근 그는 토머스 쿤을 비롯한 여러 과학철학의 논의를 다루고 있는데 데란다의 학문적 여정이 과학에 이르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과학을 배제한 대부분의 철학 논의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96년 뉴욕에 거주하던 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당시 강단 좌파가 금과옥조로 삼던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 예를 들어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등을 비판하기 위해 ‘지적 사기’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술지 <소셜 텍스트>에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향하여’라는 가짜 논문을 제출해 출판에 성공했고, 이 사건 이후 서구 지식인 사회는 ‘과학전쟁’이라는 격렬한 지적 논쟁에 빠져들었다. 소칼의 책 <지적 사기>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모호한 개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수학과 물리학의 개념을 맥락 없이 인용한, 학자적 윤리를 위반한 인물로 묘사된다.

한국에서 데란다를 적극적으로 다룬 논문은 윤지선의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 단 한편뿐이다. 이 논문은 데란다의 ‘신물질주의’라는 이론틀로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발생 과정을 분석한다. 논문엔 형태발생학에서 사용하는 여러 개념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곤충의 발생과 인간의 발생을 아무런 맥락 없이 억지로 연결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특히 한남충을 고체 상태로, 한국 남아를 액체 상태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기체 상태로 비유하면서 비선형 동역학을 가져다 쓰는 부분은 앨런 소칼이 지적한 들뢰즈의 오류를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관음충 지수를 보여주겠다면서 관음충을 판단할 수 있는 아무런 공식이나 숫자도 내놓지 않는다. 위상학을 다루는 부분에선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데, 위상학이 이 논문에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데란다의 저작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과학에 대한 유일한 참고 문헌은 폴 휴잇이 지은 <수학 없는 물리>다.

이 논문은 개념에 대한 몰이해뿐 아니라, 학문적으로 불성실한 인용으로 여러번 논란이 됐다. 윤지선은 논문에 대한 비판에서도 편협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데, 예를 들어 “데란다와 들뢰즈 철학 세부전공 권위자인 심사자 3인에 의해 게재된 논문에 대해 비전공자인 생물학자가 판단의 날을 들이대는 것은 월권 행위”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데란다 전공자가 아니면 자신의 논문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런 권위적 태도야말로, 윤지선이 근거로 삼고 있는 데란다가 혐오하던 학자의 태도일 것이다. 데란다와 함께 신물질주의 사조에 속해 있는 철학자의 상당수가 과학자로 시작해서 과학학에 이른 브뤼노 라투르, 캐런 버라드, 도나 해러웨이 등을 포함한다. 김정한에 따르면 신물질주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다학제를 가로지르는 시도”다. 윤지선의 논문은 그런 다학제적 시도를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더욱 심각한 파국은, 명백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한 철학 논문에 대해 한국 철학계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왜곡된 동료 의식 등으로 인해, 철학계는 황우석을 딛고 일어선 과학계와는 다른 경로를 걷게 될 것이다. 한국의 인문학은 대학의 위기와 함께 파국을 맞고 있다. 그리고 한국 강단 철학계엔 윤지선을 비판할 철학자가 단 한명도 없다. 철학이 철학에 대해 침묵한다면, 그런 철학은 죽은 것이다. 한국 철학계가 이 사태를 어떻게 다루는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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