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경기 평택시 안중읍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 고 이선호씨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평택/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 프리즘] 이재훈 ㅣ 사회정책팀장
기자가 된 뒤 가장 먼저 배운 일은 죽음을 대상화하는 일이었다. 매일 경찰서에서 수많은 죽음과 마주했지만 나는 그 죽음들을 애달파할 겨를이 없었다. 대신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를 살피고 죽은 이의 사회적 명망도에 따라 기사 가치를 빠르게 따져야 했다. 이 직업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겨우 이런 것이었나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일 때, 동료들은 ‘모든 죽음을 똑같이 보도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뉴스 보도는 종국에 선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또래 대학생 두 명의 죽음이 다른 층위로 세상을 흔들고 있다. 한 명은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실종됐다가 닷새 만에 숨진 채 발견된 22살 대학생 손정민씨다. 또 다른 한 명은 경기도 평택항에서 하청 인력업체에 소속돼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300㎏ 무게의 개방형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23살 대학생 이선호씨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두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손씨의 죽음에는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움을 나타내며 미궁에 빠진 사망 경위를 직접 수사하듯 추적했다. 이씨의 죽음은 숨진 지 15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세상에 알려졌는데, 알려진 뒤에도 죽음에 대한 애도가 보편적으로 퍼지진 않았다. 이를 두고 의대생과 하청 노동자라는 두 대학생의 계급 격차가 사회적 반응의 크기에서 차이를 낳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손씨의 죽음에 이씨의 죽음처럼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진 않지만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억울할 수 있기에 관심이 더 많이 쏠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반론도 있었다.
사람은 똑같이 태어나 평등하게 죽음으로 가는 시간 위에 있지만, 개별적인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 일가의 ‘세금’을 바라보는 세상의 태도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13년 전 ‘삼성 비자금 사태’ 때 한 기부 약속을 뒤늦게 이행한 것에 더해 당연히 내야 할 상속세를 냈음에도 세상은 그저 기부와 세금의 규모에 압도돼 찬사를 쏟아냈다. 이건희의 죽음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와 두 대학생의 죽음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언론이 말하는 뉴스 가치만큼이나 선택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부추기고 세상은 어차피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재확인해준 건 이 죽음들을 차별적으로 떠들썩하게 세상에 매개한 언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누구의 죽음도 무게가 다를 수는 없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세상이 평등하지 않은 시선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어서 언론이 이왕 선택적으로 이를 매개해야 한다면, 사망한 두 대학생의 계급 격차 그 자체보다는 두 대학생의 사망 과정에 그들이 지닌 계급 격차가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를 판단해 문제 제기의 층위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가 지난 6일 이후 며칠 동안 이씨가 죽음에 이르게 된 상세한 과정과 죽음을 부른 컨테이너 관리 부실 문제, 이씨와 같은 처지의 일용직 중심 항만 노동자들이 처한 위험한 노동 환경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전면에 앞세워 보도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지난달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통계를 보면,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로 인해 숨진 노동자는 모두 882명이다. 하루에 2.4명씩 산재 사고로 숨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이씨와 같은 18~29살 사이 청년층은 42명이다. 30~39살은 64명, 40~49살은 137명, 50~59살은 292명이다. 무엇보다 60살 이상이 347명으로 39.3%나 된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가 다수일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산재 사고 사망자는 94명(10.7%)에 이른다. 다시 한번 언론이 이왕 선택적으로 이 사실을 매개해야 한다면, 그다음에 주목해야 할 죽음은 60살 이상 고령층,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의 산재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미 불평등한 세상을 바라보며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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