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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농문화와 수어는 나의 유산

등록 2021-05-19 13:41수정 2021-05-20 02:37

[숨&결] 이길보라ㅣ영화감독·작가

한 방송사에서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다른 시선을 가진 네 사람이 같은 주제에 대해 5분 정도 분량으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시선으로 그 주의 주제를 다룬다. 오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매체이다 보니 글로는 다룰 수 없는 소재와 방식을 실험하게 된다. 이번 주제는 ‘장난감’이었다. 어렸을 적,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면 부모는 입에 손을 대었다가 떼며 “어부부부버버”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떤 부족이 의례를 치를 때 내는 소리 같았다. 동생과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함께 소리 냈다. 농인 부모는 차 안으로 가득 쏟아지는 불빛을 즐겼고, 청인인 우리는 부모가 내는 정체 모를 소리를 즐기며 춤을 췄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이크 앞에서 입에 손을 대고 소리를 냈다. 오디오가 꽉 찼다. 팟캐스트를 들을 청취자들이 깜짝 놀라겠다 싶었지만 그것 또한 유쾌한 경험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녹음했다.

그런데 부모는 왜 그런 소리를 냈을까? 세상에 어떤 가정이 이런 놀이를 장난감 삼아 했을까? 노란 불빛이 쏟아지는 터널에 진입했을 때 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가득 내며 자녀와 놀았던 이유는 뭘까? 농인 부모에게는 가득 쏟아지는 불빛이 꼭 시끄러운 소리 같았을까? 터널 속을 빠르게 주행하면 느껴지는 진동감이 몸으로 느껴지는 소리였을까? 터널은 캄캄하고 시끄러우니 요란하게 춤을 추고 난해한 소리를 내는 것이 허용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 걸까? 어른이 되어 이제는 부모와 하지 않는 놀이를 떠올렸다. 그건 농인 부모와 청인 자녀가 함께 사는 우리 집안만의 의례이자 농문화였다.

매년 전세계 코다들이 모이는 코다국제콘퍼런스에는 여러 종류의 소모임이 열린다. 자신의 정체성과 관심 분야에 따라 소모임을 선택하여 들어갈 수 있다. 나는 그중 형제, 자매를 둔 이들이 모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두명의 동생을 두고 있는 50대 여성 미국인 코다가 말했다. 부모에게서 수어를 배웠는데 얼마 전 부모를 여의었다고. 이제는 부모와 수어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수어는 나의 첫 언어인데 부모님이 없는 세상에서 수어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묻게 된다고 말이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이제 막 ‘코다’라는 단어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첫 코다 모임을 시작한 터였다. 20대, 30대가 주요 구성원이었기에 그 나이 또래 코다들이 경험하는 일을 주로 나눴다. 그런데 40대 코다는 40대 코다만의, 50대 코다는 50대 코다만의 고민이 있었다. 생애 주기, 형제자매 유무, 사용하는 언어, 직업, 성정체성, 인종, 민족, 계급별로 서로 다른 이야기가 존재했다. 그의 질문은 내게 던져졌다. 수어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에게 수어와 농문화는 무엇이 되는 걸까? 수어통역사와 같은, 농사회 안에서 농인을 대상으로 수어를 사용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코다인 내게 농문화와 수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책 <우리는 코다입니다>를 함께 쓴 한국계 미국인 코다 수경 이삭슨은 이렇게 말했다. 수어와 농문화는 농인 부모뿐 아니라 코다인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고. 코다인 내가 농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수어는 나의 언어이니 그건 코다의 유산이라고.

매년 4월 마지막 주 일요일은 ‘엄마 아빠 농인의 날’이다. 세계 각국의 코다들이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을 축하하며 수어와 농문화를 기린다. 나는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청인인 동시에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수어를 모어로 습득한 코다다. 수어와 농문화는 나의 역사이자 유산이다. 나는 말하고 쓰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문화를 전승하고 코다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반이 된 수어와 농문화, 우리는 이 찬란하고 유구한 유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전승할 것인가. 나의, 코다의 역사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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