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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 제헌위원 뽑은 칠레의 새 시대 헌법

등록 2021-05-20 18:38수정 2021-05-21 02:36

[통신원 칼럼] 김순배ㅣ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지난 20여년간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기치 아래 헌법이 수차례 바뀌었다. 더러는 최고 권력자들이 연임제한 폐지 등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서 뜯어고쳤다.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지금 칠레는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의 혁신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담아 새 헌법을 제정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그 변화의 물결은 5월15~16일 실시된 제헌위원 선거에서 다시 드러났다.

이번 선거는 여러가지로 역사적이다. 첫째는 과정이다.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사회적 갈등이 폭력과 과잉진압의 위기를 넘어, 제도화를 위한 민주적 절차를 따르고 있다. 하루 6천명 넘는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는 중에도 선거가 치러졌다. 헌법을 바꿔 사회를 혁신하자는 시위대의 요구가 정치적 합의로 이어지고, 지난해 10월 국민투표에서 78%의 압도적 찬성으로 확정된 이후의 절차다.

둘째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다. 새 헌법은 상·하원 의원들이 아니라, 이번에 국민들이 100% 직접 선출한 제헌위원들이 작성한다. 칠레 역사상 처음이다. 제헌위원 투표용지는 신문지 한 면을 펼쳐놓은 만큼 컸다. 전체 155명을 뽑는 선거에 1278명이 후보로 등록했다. 내가 투표한 선거구에는 7명을 뽑는데 후보자가 78명에 이르렀다. 전직 장관은 물론 변호사, 배우, 간호사, 교사 등 다양한 시민이 선출됐다. 집권 우파와 중도좌파 등 기성 정치권의 참패, 시위 현장에 나섰던 평범한 시민이 참여한 무소속 연합의 돌풍으로 변화의 요구가 확인됐다. 공산당 등 급진좌파가 이번에 동시에 치러진 도지사, 구청장, 시의원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것도 뿌리 깊은 정치 불신과 혁신의 열망을 나타낸다. 우파에서는 ‘과격한 헌법’이 작성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셋째는 다양성이다. 제헌위원은 성비균형제 원칙에 따라 남성 78명, 여성 77명이 선출됐다. 2017년 의회 선거에서 여성 당선자가 22.6%였던 것에 비하면, 정치적 지각변동이다. 앞으로 다른 선거에서 이런 원칙의 적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다. 또 칠레에서 소외됐던 마푸체, 아이마라 등 10개 원주민에게 17석이 배정됐다. 전체 유권자 1490만명 가운데 124만명인 원주민 유권자 비중에 비해서 의석이 훨씬 많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장치로 선출됐다. 낙선했지만, 15살 때 이민 와 30년째 태권도를 가르치는 교민 윤성영씨도 출마해 2339표를 받는 등 다양한 소수가 출마했다.

이제 과제는 새 헌법의 내용이다. 그동안 존엄, 정의, 인권 등 거대한 화두들이 논의됐다. 국민은 시장과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고 국가를 보조자 역할에 머물게 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헌법과 그에 기반한 사회 모델의 폐기를 원한다. 대신 교육과 의료, 연금 등 공적 영역에서 국가의 책임을 확대하는 복지국가를 향한 사회 모델로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악 수준의 빈부격차는 더 드러났고, 국가의 역할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대통령 권한 축소를 통해서 의회와의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권력구조 개편, 원주민에 대한 자치권 인정 및 다민족국가 명문화 여부 등도 핵심 의제다.

그런데, 제헌위원은 어느 정치세력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새 헌법의 각 조항에는 제헌위원 3분의 2 이상이 합의해야 하기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상과 현실도 충돌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대화가 강조되는 이유다. 거대한 도전 앞에 놓인 칠레의 도도한 변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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