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신진욱ㅣ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충격적 참패를 당했을 뿐 아니라,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야권 유력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위협적 수준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패배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반성, 쇄신의 전기를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상반된 방향의 대응들이 돌출하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부동산이 문제라 하니 난데없이 종부세 축소, 재건축·재개발 규제완화 등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는 안들이 튀어나온다. 청년층이 실망했다 하니 청년들의 경제적 고통과 절망을 더 경청할 생각은 않고 마치 ‘이대남’ 다수가 성차별주의자라서 민주당에 화가 난 듯이 현실을 오인하기도 한다. 다 잘못 짚었다.
이런 반응은 민주당의 오래된 나쁜 습관이다. 선거에서 패하기만 하면 ‘너무 왼쪽으로 갔다’며 오른쪽으로 급회전하다 경사로에 빠져 추락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실은 노동자·중산층을 규합하는 데 실패한 게 문제였는데, 어차피 민주당 찍지 않을 부자들과 기업 눈치 보느라 방황을 한다. 이렇게 되면 민주당은 지지층을 잃고, 지지층은 마음 둘 곳을 잃는다. 이것은 이념과 노선뿐 아니라, 정치적 합리성의 문제다.
지금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최근 선거 결과나 여론조사 동향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현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많은 한국 시민은 불과 4년 전에 평화적 촛불집회로 세계로부터 민주주의의 모범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불과 3년 전에 한반도 평화의 진전을 다 함께 기뻐했으며, 불과 1년 전에 정부와 합심하여 코로나를 막아 민주주의의 힘을 세계에 확인시키기도 했다. 사회 전반의 보수화 추이가 아니다.
좀 더 장기적인 한국 정치의 변화 추이를 보면 이 점은 더 명확해진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동안 지역갈등이 선거정치를 좌우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을 기점으로 유권자의 세대와 가치가 강력한 변수로 부상했다. 지금 가장 주목할 점은, 2010년대 이후 유권자의 소득, 재산, 계층의식 등 사회경제 변수가 점점 중요해졌고, 또한 진보적 태도가 확대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의 변화도 그런 사회변동 추이와 함께 일어났는데, 그 본격적 출발점은 2011년에 보편적 복지의 지향과 ‘3무 1반’(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 반값등록금) 정책을 공식화한 시점이다. 이후 민주당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이명박 정부의 탈규제·민영화·경쟁교육·토건주의에 반대하여 외친 ‘함께 살자 대한민국’이라는 염원을 수용해갔고, ‘리버럴 보수정당’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그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지금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에 대해 ‘이게 무슨 진보 정권이냐?’는 식의 비판은 현실의 일면만 본 것일 수 있다. 집권세력의 의지 문제든, 관료집단의 힘 때문이든, 정부여당의 정책 노선에 대한 실망에 적잖은 사람이 동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상황은 단순히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는 식의 이념적 단죄로 접근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
현 정권을 진보 정권으로 부를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찍은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가 이념적 진보층이었다. 둘째, 문재인 정권은 진보주의 가치(공정, 평등, 정의)와 국정 목표(사람중심경제, 포용복지국가, 노동존중사회)를 중심에 놓고 지지층과 가치동맹을 맺었다. 셋째, 한국 진보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해온 많은 전문가, 시민사회, 정당인이 현 정권에 참여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지난 십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이념과 가치의 진보화, 사회경제적 의제의 확대라는 역사의 물결을 타고 집권했으며, 또 그 가치·의제·세력을 응집했다. 그런 만큼 이 정권의 성패는 한국 진보 세력 전체의 미래를 크게 규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주의자는 지금 남의 일처럼 냉소할 수 없으며, 비판하고 촉구하고 동참하길 멈출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최근 여론 지형의 급변은 한국 정치가 중대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음을 뜻한다. 십여년 전부터 꾸준히 진행된 시민들의 민주적, 진보적 전환의 주기가 종결되고 거대한 백래시의 주기로 넘어갈 것이냐, 아니면 진보의 역사를 다시 한번 힘 있게 밀고 나가 더 나은 진보의 미래를 만들 것인가? 민심의 큰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는 정치적 선택과 리더십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