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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윤석열의 ‘헌법 정신’ 유감

등록 2021-05-25 17:48수정 2021-05-26 15:52

한겨레 프리즘

김경욱 법조팀장

불의한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스러진 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는 일은 참담하다. 광주광역시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의 각 무덤 앞에는 그곳에 잠든 이의 사진이 놓여 있다. 교복 차림의 앳된 소년·소녀에서부터 새하얀 면사포를 쓴 웨딩드레스 차림의 희생자까지. 사진 속 인물들은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듯 생생하다.

“5·18은 어떤 형태이든 독재와 전제에 대한 강력한 거부와 저항을 명령하는 것이다.” 전직 검찰총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묘역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윤석열 전 총장은 지난주 언론 인터뷰를 통해 “5·18 정신은 살아 있는 시대 정신이자 헌법 정신”이라며 5·18에 평소 자신이 강조해온 ‘헌법 정신’이 담겼다는 내용의 5·18 메시지를 내놨다.

지난 3월4일 사퇴 이후 잠행을 이어오던 그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계기로 침묵을 깬 데는 나름의 계산이 깔렸을 것이다. 중도·진보층 공략, 호남 구애 등. 하지만 그가 밝힌 이유는 이렇다. “국민이 많이 희생된 사건이고 지금의 헌법이 태동된 사건인데 여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공적인 위치에 있었던 인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번 메시지는) 책임 있는 지성인이자 전직 검찰총장으로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책임 있는 지성인이자 전직 검찰총장으로서”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면, 그는 묘역에 잠들어 있는 오월 영령 등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부터 해야 했다. 5·18 가해자는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지만, 검찰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1995년 7월, 5·18 관련 내란혐의 등으로 고소·고발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피의자 58명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주체는 당시 그가 몸담고 있었던 검찰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책임자 처벌에 눈감은 것도, 군부의 유혈진압에 대해 “현장 지휘관들의 엄격한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과 계엄군 간에 적대감으로 인한 살상행위로 발전한 것”이라며 사실상의 면죄부를 준 것도 검찰이었다. 물론, 당시 2년 차 검사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는 반론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자연인 ‘윤석열’이 아니라, “전직 검찰총장으로서” 그가 이번 5·18 메시지를 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윤 전 총장의 ‘헌법 정신’은 독선적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5·18은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정신”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우리가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검찰이 자행한 수많은 인권침해 수사와 조작·은폐 수사, 권력에 기생한 역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5·18 정신을 선택적으로 써먹고 던지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지난해 2월 검찰총장으로 광주고검·지검을 방문했을 때 “오월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오월어머니’들의 물음을 차갑게 외면한 바 있다. 검찰총장의 대권 직행 역시, 헌법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윤 전 총장이 ‘대권 수업’을 위해 경제·노동·외교·안보·과학 분야 등의 전문가를 만나 정책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는 보도가 시시각각 전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의 대권 수업에서 빠진 대목이 있다. 바로 검찰 과오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신순용 전 소령의 사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 전 소령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3명을 사살해 암매장했다고 2017년 고백한 인물이다. 그는 지난 21일 5·18민주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고 “늦게 찾아와 죄송하다.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천번 만번 사죄하겠다”고 오월 영령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참배한 김영훈 5·18 유족회장은 “큰 용기를 내줘서 감사하다. 앞으로 화해의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말했다. 선택적 정의는 헌법 정신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일이야말로 헌법 정신이다.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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