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69년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끼리’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71년 경기 동두천에 있던 주한미군 제7사단도 철수했다. 당시 한국이 군인 5만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미국을 도왔지만, 미국은 한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7사단 철수를 강행했다.
미국을 믿을 수 없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에 나섰다. 군 전력 증강 사업인 ‘율곡사업’을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무기 개발은 보안을 위해 ‘위장 사업명’을 사용한다. 1974년 미사일 개발 사업은 ‘항공공업계획’이란 사업명으로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유도탄연구소는 ‘대전기계창’, 충남 태안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 비행시험장은 ‘안흥측후소’로 위장했다.
1978년 9월26일 미사일 공개 시험 발사에 성공해,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됐다. 첫 국산 미사일은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개조한 지대지 미사일이었다. 이 미사일 별칭이 ‘백곰’이었다. 겨울에 폭설을 맞으며 안흥 비행시험장 야외에서 일하던 연구원의 모습이 마치 북극곰 같아서였다.
백곰 발사 뒤 주변 강대국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백곰을 핵무기 운반체로 본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핵 개발과 연관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고, 소련 국방부는 “남한의 핵 개발을 경고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도 “탄도미사일 개발 뒤에는 핵을 개발할 것이냐”고 한국 정부를 추궁하고 “미사일 사거리를 서울에서 평양 타격이 가능한 180㎞로 제한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미국 정부 특사까지 국방과학연구소를 찾아와 미사일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1979년 7월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사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해 9월 노 장관은 ‘(미국이 용인 가능한) 사거리 180㎞ 이내, 탄두 중량 500㎏ 이내로 개발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종료된 ‘미사일 지침’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한-미 미사일 지침’으로 불렸는데 ‘미사일 지침’이 정확한 명칭이다. 양국 합의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통보한 ‘미사일 개발 자율규제 서한’이기 때문이다. 권혁철 논설위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