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근작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설경구)은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라고 말한다. 실제 기록에 근거한 대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이해도가 낮은 ‘아나키즘’의 핵심을 잘 짚고 있다. 아우 약용(류승룡)의 목민적 사유와 자연스럽게 대비한 연출은 아나키즘의 결까지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나키즘(anarchism)은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엉터리없는 번역은 아니지만, 납작하고 빈약한 번역이다. 아나키즘이 반대하는 대상은 정부에 국한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국제관계 등 모든 분야와 차원의 억압적 지배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무정부주의’는 미국 서부영화 속 같은 무법천지를 연상시키는 부정적 효과가 크다. 정약전이 ‘무법자 총잡이’로 둔갑하는 꼴이다.
물론 아나키즘이 통치적 질서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건 분명하다. 심지어 혼돈을 억압에 맞설 수 있는 조건으로 인식하는 줄기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나키즘의 본령을 보여준다기보다 아나키즘의 하위범주가 통약 불가능할 만큼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구성된 특성을 보여준다. 아나키즘 앞에 조합주의부터 채식주의까지 온갖 층위의 관형어가 붙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아나키즘의 역사는 고대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대적 아나키즘은 19세기 프랑스의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나 러시아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같은 이들로부터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사적 소유 철폐를 위한 혁명운동을 주창하면서도 중앙집권적인 마르크스주의에도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분권과 자치가 없으면 평등도 해방도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식민 지배가 아나키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반자본주의와 반볼셰비즘에 민족주의가 결합한 형태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이 해방돼야 인간도 해방될 수 있다고 봤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대표적이다. 지난 9일 우당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식 참석자 가운데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단연 튀었다. 유신헌법의 그림자가 드리운 ‘자유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검찰주의자가 자신의 기념관을 대권 행보의 무대로 삼은 걸 알면, 우당 선생은 뭐라 할까.
안영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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