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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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만을 중시하는 공정성은 불평등을 낳는다. 그 끝에는 가장 공정하지만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있다. 이런 공정성은 다양성을 해친다. 사람들을 오로지 하나의 기준으로, 한 줄로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감사합니다. 축복받으세요.” 자원봉사 하러 간 내게 아주머니는 문드러진 손을 내미셨다. 조용한 성당 앞에서 건네드린 빵과 우유를 받아 드신 다음이었다. 활짝 웃는 얼굴과 온화한 말씨가 어린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수십년이 지나서도 내가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응답할 때 종종 떠오르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 나는 소록도에 살았다. 한센인들이 사는 남해안의 외딴섬이었다. 국립 한센병원이 있는 그 섬에서는, 모두가 자기 몫의 집과 밥을 보장받고 살았다. 그들은 치료도 받았지만, 일도 하고 종교활동도 했고 어울려 놀며 봉사활동도 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때론 다투기도 했다. 장소만 특별했을 뿐, 여느 삶과 같았다. ‘공정성’이라는 화두가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다. 젊은층의 ‘공정성 감각’이 남다르다는 분석이 넘쳐난다. 거대야당의 대표 자리를 ‘공정한 경쟁’을 부르짖는 청년 정치인이 차지했다. ‘공정한 법집행’이라는 가치를 내건 전직 검찰총장은 한달음에 유력 대선주자가 됐다. 핵심은 능력주의다. 무능한 사람들이 비켜나게 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자는 이야기다. 액면 그대로는 옳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다. 우리 사회가 정말 그들이 말하는 대로 ‘공정한 사회’가 된다면,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은 확실하게 보상을 받고 능력 없는 사람들은 설 자리를 빼앗긴다면, 소록도의 그 아주머니 같은 분에게도 설 자리가 남아 있을까? 그분이 어린 내게 끼쳤던 좋은 영향도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능력만으로 모든 사람을 평가한다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혹은 능력은 있지만 지금 당장은 입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생존의 근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서글프게도 공정이 찾아온 지금은 성장이 멈춰가는 시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회가 닫혔을 때 사람들은 나눠 갖는 규칙에 더 민감해진다. 성장하던 시대, 능력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포용과 분배를 이야기했다. 특별히 선해서가 아니다. 남은 몫을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나누어도, 새롭게 생기는 몫을 더 차지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양극화와 분배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는 시대,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의 몫을 가져와야 자신의 몫이 생긴다는 조급함 때문이다. ‘결과를 나누는 규칙’으로서의 공정성 담론이 기세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쉽지만 청년층이 많이 갖고 있다는 ‘공정성 감각’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세대 간 불공정이나 성별 불공정 담론도 결국 ‘지금 가진 것을 나누는 방법’에 대한 더 예리한 규칙을 찾고 있을 뿐이다. 성장이 없는 제로섬 시대, 능력만을 중시하는 공정성은 불평등을 낳는다. 그 끝에는 가장 공정하지만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있다. 이런 공정성은 다양성을 해친다. 사람들을 오로지 하나의 기준으로, 한 줄로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버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단일한 기준에 맞춰 경쟁하며 획일화되기 쉽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미국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불평등을 키우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그들만의 자산은 공정성 담론의 옷을 입고 자신의 특권을 키우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공정성 담론이 비뚤어진 능력주의를 강화하고, 능력주의는 다시 사회 불평등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다. 공정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다.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통해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분배 규칙에 예민할 이유가 줄어든다. 과거와 같은 양적 성장은 이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세먼지와 탄소를 배출하고 쓰레기를 만들며 과로에 시달리는 성장은 더 이상 성장이 아니다. 지금부터의 성장은 환경을, 인권을, 행복을,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 삶의 다양성을 키우는 참성장이어야 한다.

이원재 LAB2050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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