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강도희·최연진 | 대학원 석·박사 과정(국문학)
출근길에 문득 옆 사람 휴대전화 화면을 보면 대개 둘 중 하나다. 주식 차트거나, 코인 차트다. 해외 시장 조사가 생업인 내 주위에선 해외주식 쪽이 대세라 일론 머스크 트위터에 새 글 올라오면 테슬라 주식 가진 동료에게 오늘 주가는 어떤지를 물어보는 게 새로운 안부인사가 됐다. 3년 전 샀다가 파는 걸 깜빡 잊은 미국 테크주를 약소하게 갖고 있는 나 역시 하고 있던 일이 막힐 때면 문득문득 주식 앱을 켜 본다. 그래 봐야 조기퇴사는커녕 이달 대출 이자도 안 나오는 약소한 수익이지만 지난여름 아마존 주식 판 돈으로 일명 ‘베이조스가 보내준 여름휴가’를 갔을 때는 창고 직원들 화장실 안 보내려고 페트병에 소변보게 만들었다는 이 악덕 자본가에게 아주 잠깐, 약간쯤 친애의 감정을 느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다. 옆 팀의 누구는 앉아만 있어도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몇억씩 재산이 불어나는데, 남의 집에 은행 돈으로 얹혀사는 처지에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일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최근의 주식 열풍에 대한 분석마다 부동산 시장에서 탈락한 2030 청년들의 박탈감과 분노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도 주식 말고 집을 사고 싶다’는, 나를 비롯한 청년 투자자들의 속물적이라면 속물적일 투기 욕망이 딱히 도덕적으로 큰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배곯은 사람이 뺏긴 떡 탐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다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청년들이 되찾아 먹으려는 이 떡이 살아갈 곳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남부럽지 않은 투자 자산으로서의 집이라면, 그때도 과연 청년들의 주식 투자에 ‘동학’이니 ‘개미들의 난’ 같은 운동적인 수사를 붙여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밈 주식 열풍으로 번진 게임스톱 주가폭등 사태를 주도한 레딧 이용자들은 99%의 개미들이 1%의 헤지펀드를 저지했다며 공매도 주식에 대한 자신들의 집단매수를 두고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의 진화형이라고 자찬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이 원하는 건 인터넷에서의 관심자본을 무기로 월가와의 원금 차이를 상쇄할 만한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실제로 매수·매도 타이밍을 잡기 위한 정보력도, 타이밍 맞춰 재빠르게 움직이기 위한 여유자금도 없는 후발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떠넘김으로써 시세차익을 챙겨 가는 방식은 그들이 비판하는 월가 기관투자자들의 ‘작전’ 방식을 거의 닮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운동’으로 명명하는 순간,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애초 문제 삼았던, 실물경제의 성장과 무관한 금융자산의 가치 상승을 통한 부의 창출이 99%의 이름으로 은근슬쩍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애초 금융시장이 누리는 특권에 기반을 두고 있는 부가 그들의 손에 놓였다는 이유로 어느 틈엔가 ‘공정한 제 몫’으로 둔갑하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다.
최근의 소위 ‘이대남 현상’을 둘러싼 담론들을 볼 때마다 자꾸만 몇달 전 게임스톱 사태가 겹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지금의 이십대 남자들이 외벌이로도 십년만 바짝 모으면 그럭저럭 내집 마련이 가능한 조건의 일자리를 박탈당한 것은 명백히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이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불평등의 피해자 중 하나라는 점이 그들이 가진 모든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진 않는다. 그럼에도 남성들의 백래시에 ‘절망한 청년’을 주체로 소환하길 좋아하는 미디어들은 애초에 여성에 대한 배제와 착취에 기반해 얻어진 것이었던 ‘아버지의 지위’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공정성이니 평등에 대한 요구로 둔갑시킨다. 구조적 불평등을 지시하는 대신 청년들의 절망을 그들 일부의 욕망에 투영된 불평등을 공고화하는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금융시장의 건전성과 전망에 대한 모든 논의를 집어삼키고 있는 밈 주식의 미친 랠리를 닮은 이 청년담론의 아수라장 속에 남겨지게 된 나는 묻고 싶어진다. 우리의 ‘절망’이란 정말로 이런 것이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