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7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외교부의 협상 원칙과 ‘서둘지 말라’는 외교 원로들의 고언을 모두 무시하고, 일본의 모든 요구를 수용한 사실상의 ‘항복 외교’를 서둘러 밀어붙인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협상을 맡은 외교부는 지난해 11월 일본과 공식 협상을 시작하면서 ‘일본 정부의 사과와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를 마지노선으로 정했고, 최소한 둘 중 하나는 관철해야 한다는 협상 방침을 막바지까지 고수했다. 보수 성향의 외교 원로들도 “서두르다 (일본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위안부’ 합의 때보다 심한 갈등으로 한-일 관계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취지의 우려를 정부 쪽에 지속적으로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합의를 재촉하며 “세게 밀어붙였다”는 게 여러 당국자와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이 협상 과정에서 일본에 치명적 약점을 잡히게 만들었다.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는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한국의 협상 동력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다.
윤 대통령의 조급증은 일본과의 타협을 “결단”으로 포장해 보수층에 ‘정치적 업적’을 과시하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정부가 악화시켰다”고 비판해온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치적을 내세우려는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정부 산하 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 배상금을 주는 정부안을 발표한 이후 대통령실이 윤 대통령의 미·일 방문 일정을 확정짓느라 분주한 것은 이런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달 중 일본 방문, 4월 미국 국빈방문, 5월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 등으로 대통령의 국제적 위상을 띄우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7일 국무회의에서 “한-일 협력이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라며 자화자찬한 것도 이런 의미로 들린다.
미-중 패권경쟁의 한가운데에 낀 한반도 주변 정세와 경제·공급망 변화 등 복합 변수들을 신중하게 따지지 않고,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가 만병통치약인 듯 밀어붙이는 윤 대통령의 외교는 한국을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만들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 한국 강제동원 정부안 발표 뒤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역사적”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대중국 포위전선 강화의 관점에서 이번 조처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도 윤 대통령의 이런 외교적 자세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등 현안에서 한국의 굴복을 이끌어낼 지렛대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대통령은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