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이 13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로시간 관련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 및 향후 정책 추진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주 최대 52시간 초과근무가 가능하도록 하는 ‘근로시간 개편’을 일부 업종·직종에 한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월 정부는 관련 입법을 추진하다가 장시간 노동을 유발하고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은 바 있다. 그런데도 정책을 철회하는 대신 선별적으로 다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노동개혁 1호’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인가.
13일 고용노동부는 노동자와 사용자, 국민 등 6030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면접조사를 벌인 결과를 공개했다. 앞서 정부는 주 최대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한 현행 근로시간 제도를 유연화해 최대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을 추진했다. 법정 근로시간에 따라 주 40시간을 일한 뒤 최대 12시간까지만 가능한 연장근로의 관리를 주간이 아닌 월간, 분기, 반기, 연간 단위로 넓히자는 것이었는데, 반대 여론이 들끓자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며 한발 물러섰다. 조사 결과를 보면, 현행 근로시간 제도로 노동자 48.5%와 사용자 44.8%는 장시간 노동이 줄었다고 평가했다. 업무량이 갑자기 늘었을 때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고 답한 경우도 노동자와 사용자가 각각 28.2%와 33.0%에 그쳤다. 특히 현행 근로시간 제도로 어려움을 겪은 사용자는 14.5% 수준이었다.
정부는 현행 근로시간 제도를 유지하겠다면서도 일부 업종·직종에 대해선 개편을 계속 추진한다고 했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어떤 분야에 확대해야 하는지’를 물은 결과, 제조업과 건설업, 설치·정비·생산직 등에서 상대적으로 응답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필요한 경우라면 현행법상으로도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면 된다. 정부가 언급한 업종만 유연화를 허용하더라도 그 범위가 상당히 넓어 사실상 정책을 재추진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게다가 ‘노사가 원하는 경우’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미조직 노동자가 대다수인 현실을 고려하면 사용자 일방이 결정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추가적인 건강권 보호 방안도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정부 스스로도 장시간 노동 유발과 그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지난해 기준 한국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1901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149시간이나 많다. 정부가 추진해야 할 우선 과제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