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을 상징하는 말 중 하나가 ‘아메리칸 드림’이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그 유명한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 연설에서 아메리칸 드림에 자신의 꿈을 실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나에겐 아직 꿈이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에 깊게 뿌리 내린 바로 그런 꿈입니다.”
누구나 성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전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애플컴퓨터 최고경영자 스티븐 잡스는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결정 중 하나는 대학을 그만둔 일이었다”고 말했다. 대학을 때려치우고도 최고 갑부가 될 수 있는 나라, 얼마나 멋진가.
며칠 전 어느 미국인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문득 이게 화제에 올랐다. 지금도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한가? 그는 조용히 웃으며 부인했다. “지금의 미국은 내가 자랄 때의 그 미국이 아니다.” 그는 자기 가족을 예로 들었다.
그는 70년대 초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공립 초등학교를 다녔다. 전체 학생의 20% 정도가 흑인이었다. 아버지가 오케스트라 총감독으로 그의 집은 꽤 잘사는 편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 그 학교에선 백인 상류층을 찾아볼 수 없다. “백인 상류층이나 중상층은 더 이상 자식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14살이나 어린 막내여동생 역시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죽 사립학교를 나왔다.
조지 부시 행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이걸 ‘중산층이 몰락하는, 실패한 미국’이라고 규정한다. 크루그먼에게 1960년대는 ‘그래도 비교적 평등했던 사회’로 기억돼 있다. 그는 중산층 몰락의 원인으로 임금 인상의 둔화와 평등 가치의 쇠락, 강력한 노조와 진보적 세금제도의 쇠퇴를 꼽았다.
아메리칸 드림을 지탱하는 힘은 ‘계층 이동’이었다. 알코올중독자인 양부 밑에서 자랐지만 대학교육을 통해 대통령에까지 오른 빌 클린턴은 미국 사회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빌 클린턴은 빌 클린턴일 뿐이다. 통계로 보면, 날이 갈수록 계층 상승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가계소득이 한 단계 이상 뛰어오른 가족의 비율은 70년대에 비해 90년대가 훨씬 적다. 요즘 하버드대학 신입생의 4분의 3은 연봉 8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 집안 아이들로 채워지고 있다.
크루그먼이 지적한 ‘중산층 몰락’이나, 아메리칸 드림을 부정하는 미국인 친구의 말, 빈부격차의 확대는 하나의 현상을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핵심은 계층 문제다. 요즘 미국은 다시 ‘계층’에 눈을 돌리고 있다. 2주 전 워싱턴 조지타운대학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사회학 심포지엄 주제는 바로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였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초, 미국의 계층 문제를 집중 분석하는 기획기사 연재를 시작했다. 한때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계층이 더욱 굳건하게 고착화하고 있다는 인식에서다.
크루그먼의 분석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보면, 우리는 아직 미국보다는 ‘덜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왼쪽에 민주노동당이 건재하고, 노조는 약하지 않다. 70~80년대 민주화와 평등 가치를 위해 싸운 세대가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다.
그러나 계층간 이동이 역동적인가 하는 물음에 이르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렵다. 다시 계층 문제에 눈을 돌리는 미국을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그러나 계층간 이동이 역동적인가 하는 물음에 이르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렵다. 다시 계층 문제에 눈을 돌리는 미국을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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