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유권자에게 한 약속은 천금의 무게를 지닌다. 애초 지키지 못할 공약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약속했다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한다.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공약 파기에도 최소한의 전제조건은 있다. 첫째, 누가 보기에도 공약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 둘째, 뼈아픈 자성과 통렬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국민에게 엎드려 사죄하고 상처 난 마음을 달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만큼 공약 파기가 지닌 의미는 심각하다.
박근혜 정부가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지원 등과 관련된 대선 공약을 뒤집기로 공식 결정한 모양이다. 박 대통령은 26일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자리에서 복지공약 후퇴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의 말을 일단 지켜보아야 하겠으나, 지금까지 흘러온 양상을 보면 공약 파기와 관련한 최소한의 조건이나마 충족했는지 의심스럽다.
이 정부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65살 이상 모든 노인에게 매달 20만원 지급’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급여화’ 등의 복지공약을 손바닥 뒤집듯이 내팽개쳤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초연금을 국민연금 가입 여부와 가입 기간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4대 중증질환 진료비에서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도 제외했다. 정부여당은 그러면서 “대선 캠페인과 공약에는 차이가 있는 것” “기초노령연금과 기초연금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서 온 오해일 뿐 말 바꾸기가 아니다”는 따위의 변명만 일삼아왔다. 증세 등을 포함해 공약 준수 방안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욕을 덜 먹고 공약을 접을 것인가에만 신경을 써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국민에 대해 미안한 마음과 깊은 책임의식을 느끼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국민을 상대로 직접 이해를 구하지 않고 국무회의 자리에서 입장을 밝히겠다는 것부터 그렇다. 이런 사안은 내용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한 법인데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한 간접화법 방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실망과 배신감에 빠진 국민을 제대로 다독거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 파기는 단지 복지 분야에 그치지 않고 경제민주화,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과 중립성 확보, 전시작전권 환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박 대통령의 이미지도 이미 빛이 바랬다. 정치의 근본은 믿음이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믿음을 깨뜨리며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조변석개 정치인’인가 [한겨레캐스트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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