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를 상대로 한 청와대의 고소는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 ‘문고리 3인방’ 등이 ‘정윤회씨 국정개입 보고서’를 보도한 <세계일보>를 고소한 데 이어 이번에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 실장의 지시로 문건이 만들어졌다’는 <동아일보> 보도와 관련해 기사를 쓴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세월호 사건 때도 그랬지만 청와대가 걸핏하면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이제는 청와대한테 고소를 당하지 않은 언론사를 먼저 세는 편이 빠를 지경이다.
김 실장의 고소 소식을 들으며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명예’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지금은 김 실장의 명예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가 자신들이 만든 보고서를 스스로 ‘찌라시’라고 규정한 순간 한국은 이미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왕조시대 구중궁궐에서나 있을 법한 치열한 권력암투, 무너진 공직 기강, 서로 물고 뜯는 권력의 난맥상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국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 됐다. 그런데 김 실장은 한가하게 자신의 명예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라의 명예를 더럽힌 책임을 묻자면 박근혜 대통령 다음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바로 김 실장이다. 문제의 정윤회씨 보고서가 작성된 것부터가 ‘비서실장 교체설’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문건을 보고받고 그대로 덮어버린 사람도 김 실장이고, 문건 유출 사실을 알고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화를 키운 사람 역시 김 실장이다. 정윤회씨 문건 파동 하나만으로도 김 실장은 입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랄 형편이다.
이번 문건 사건을 통해 드러난 김 실장의 노회하고도 약삭빠른 모습은 이미 세간의 웃음거리로 등장했다. 문고리 3인방의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모를 아리송한 위치, 그러면서도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자리를 보전하는 데는 철두철미한 모습이 쓴웃음을 자아낸다. 비서실장의 무책임하고 그릇된 처신에 손가락질이 쏟아지고 있는 마당에 언론사 고소를 통해 그가 무슨 명예를 건지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김 실장이 지금 할 일은 고소가 아니라 청와대를 떠나는 일이다. 그가 비서실장으로 버티고 있는 한 검찰 수사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게 돼 있다. 하루빨리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그나마 남아 있는 명예라도 지킬 수 있는 길임을 김 실장은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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