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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황 총리의 궤변에 담긴 국정화의 본질

등록 2015-11-03 18:37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폭거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나 통용되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도입하려는 것이 그렇거니와, 이를 밀어붙이는 과정도 민주국가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논리와 행태로 일관했다. 3일 황교안 국무총리의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황 총리는 전국 2300여개 고등학교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고 나머지 99.9%가 다른 교과서들을 선택한 게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강변했다. 교학사 교과서가 외면받은 이유는 친일·독재 미화와 셀 수 없이 많은 오류 때문이었다. 질 좋은 교과서였다면 그 누가 악의적으로 채택을 방해해도 채택률이 0.1%에 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황 총리는 이런 사실에 애써 눈감고 99.9%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한마디로 99.9%가 0.1%에 맞추라는 식이다. 이게 독재적 사고가 아니면 무엇인가.

교학사를 제외한 검정 교과서들이 좌편향됐다고 정부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진실은 이미 자명해졌다. 이명박 정부에서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고 현행 교과서들의 검정을 책임졌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3일 기자회견을 열어 “현행 8종 교과서는 중도가 3종, 중도우파가 4종, 그리고 교학사가 우파 쪽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교과서에 김일성 사진은 3장,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은 1장만 실렸다’고 비난한 데 대해서도 “6·25 남침을 위해 스탈린과 비밀회담을 하는 사진이 어떻게 찬양이 될 수 있나”라고 반박했다. 중도보수 성향의 원로 역사학자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기자회견까지 자청했겠는가.

현행 교과서들이 정부 주장처럼 그토록 친북적이라면 당장 거둬들여도 모자랄 판에 박근혜 정부는 이 교과서들을 기준으로 출제될 수능 한국사 과목을 내년도부터 필수화했다. 친북 교과서를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장한 꼴이니 이런 코미디가 또 없다.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리는 모두 궤변에 불과하고 실제 목적은 친일·독재 미화에 있음도 확인됐다. 황 총리는 발표문에서 “성숙한 우리 사회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친일파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을 노골적으로 미화한 교학사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편듦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속내를 드러냈다.

한국사 수능 필수화와 교과서 국정화가 일련의 계획에 따라 추진됐고 그 중심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이 자리잡고 있음을 이제 삼척동자도 다 짐작한다. 정부가 행정예고 기간에 쏟아진 압도적인 반대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관보 게재 절차까지 어겨가며 국정화를 밀어붙인 비상식적인 행태도 그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박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국민의 반대와 민주적 원칙을 저버린 채 세계적 웃음거리인 국정화를 강행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군주제에서나 가능한 일 아닌가.

역사교과서 문제는 이제 역사 문제로 전화됐고, 시민들은 교과서가 아닌 현실에서 민주와 독재의 충돌에 직면하게 됐다. 하지만 황 총리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성숙했고 시민들은 역사의 퇴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률을 0.1%에 가둔 것이야말로 성숙한 우리 사회의 심판이었음을 박근혜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국정화가 성공하리란 바람은 헛된 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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