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정부가 교과서 집필에 군까지 참여시키려 한다니 말문이 막힌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5일 국회에서 “군에서 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국정 교과서 근·현대사 집필에 ‘군사’(군 역사) 전문가가 참여할 것을 시사한 바 있지만, 전쟁사 등에 조예가 깊은 민간 학자라면 몰라도 군이 직접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한 장관의 말에 따르면, 그런 일이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나 육군사관학교에 소속된 이들이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한다면 교과서에 군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될 게 뻔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만으로도 세계적인 놀림감이 되고 있는데 이런 사태까지 벌어진다면 우리나라는 더욱 괴상한 국가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군국주의나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이상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국정 교과서 대표 집필자로 참여한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마저 정치·경제·사회 분야 학자의 집필 참여는 긍정하면서도 “군사 전공자는 잘 모르겠다”고 선을 그었을까.
특히나 우리나라 현대사는 쿠데타와 군사독재 등 군의 악행으로 얼룩져 있다. 군이 제게 주어진 임무를 배반한 채 정치에 개입하고 군 출신 독재자들이 장기집권 음모를 획책하며 민주주의를 말살한 오욕의 역사다. 군사정권의 어둠을 벗어난 게 겨우 20년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군이 역사 서술에 참여한다면 이러한 현대사의 진실이 제대로 조명될 리 만무하다. 또 6·25와 같은 전쟁사에 국한하더라도 양민학살의 비극 등 역사의 명암이 균형 있게 서술되리라 기대하기 힘들다.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받아야 할 군이 평가자의 위치에 서는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에 대해 교과서에 정확한 내용을 담는 건 좋다. 하지만 이는 전공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고 이를 교과서 집필진이 충실히 종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 군에서 독점하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집필진에게 성의껏 제공하면 된다. 이는 검정 교과서 체제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국정 교과서라는 억지에 이어 군의 집필 참여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연출된다면 ‘군정 교과서’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국정 교과서 집필진의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일반적 우려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정녕 이 정부는 군사독재의 향수에 젖어 사리분별을 잃은 것인가.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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