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최근 국내 행보는 그가 국제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국제기구의 수장인지, 아니면 내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앞둔 ‘구태 정치인’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10년의 임기를 마치고 내년 1월에 국내에 들어와 무엇을 하든 그것을 시비할 생각은 없다. 법적으로도 40살 이상의 대한민국 시민은 누구라도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반 총장이 25일 제주에서 열린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통합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대선 출마를 시사한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28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집으로 찾아가 독대를 하고, 고건, 노신영, 신경식씨 등 원로들과 저녁을 함께한 것은 그의 마음이 벌써 ‘콩밭'에 깊숙이 빠져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꼭 찾아가 특별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왜 김종필씨였는지는 쉽게 짐작이 갈 만하다. 김종필씨가 ‘충청권의 옛 맹주'이며 ‘충청 대망론'의 창시자가 아니었어도 반 총장이 그의 집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을까. 반 총장으로서는 그를 만남으로써 충청권 표의 결집 효과를 노렸을지 모르지만, 지역주의 정치의 구태를 되풀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며칠 전 국내 대통합의 필요성을 절절히 외쳤으면서 충청 지역의 노맹주에게 특별한 예를 갖춘 것 자체가 이율배반인데다 김 전 총리야말로 바로 우리 정치가 극복해야 마땅할 공작정치의 원조가 아닌가. 10여명의 저녁 회동 참가자 중에 충청 대망론의 주창자가 다수 들어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반 총장은 29일에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열린 국제로타리세계대회에 참석한 데 이어,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류성룡 선생의 고택과 경북도청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김광림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김관용 경북지사 등 대구·경북 지역 정치인들과 점심을 함께하는 등 접촉을 했다. 다음날 경주에서 열리는 유엔 비정부기구(엔지오) 총회에 참석하는 김에 들렀다고는 하지만, 마치 4·13 총선 뒤 새누리당 친박계가 유포하고 있는 충청-대구·경북 연합정권 창출론에 꿰어맞춘 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더구나 30일 반 총장이 기조연설을 하는 엔지오 총회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특별세션으로 다룬다. 박근혜 대통령은 순방 중인 아프리카에서, 반 총장은 경주에서 새마을운동으로 안팎 연대를 하게 되는 셈이다. 반 총장은 이미 지난해 9월 박 대통령도 함께 참석한 유엔의 한 회의에서,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국가 주도 운동'이란 비판을 사고 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산불처럼 새마을운동이 번지고 있다”고 찬양한 바 있다.
유엔 총장으로서의 업적이 아닌 명성, 철학과 비전이 아닌 정치공학에 기대어 대선을 노린다면 그뿐 아니라 국가의 불행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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