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이 <한국방송>(KBS)에 수시로 ‘보도지침’을 내려 보도를 통제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 직후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한국방송 보도국장과 나눈 전화통화 기록을 비롯한 이른바 ‘김시곤 비망록’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사장이 국정원 댓글 단독 리포트 빼라 지시” “박근혜 대통령 리포트는 앞쪽으로 전진배치 또는 수를 늘리라 지시”…. 짐작만 해오던 권력의 방송장악 실태가 구체적 자료를 통해 민낯을 드러냈다.
청와대에 한국방송은 국민을 위한 공영방송이 아니었다. 정권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대통령의 치적을 널리 알리는 홍보기구에 불과했다. 한국방송 사장은 권력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이들의 끊임없는 압력과 간섭 속에서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누락·삭제·은폐되고, 정권의 홍보기사는 확대·강조·전진 배치됐다. 김시곤 비망록은 방송보도가 권력의 통제를 통해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보고서다.
이번 사건을 접하며 많은 사람이 1986년 보도지침 사건을 떠올린다. 당시 보도지침을 폭로했던 언론인 김주언씨가 다시 ‘신보도지침’ 폭로의 주역이 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바뀐 것은 ‘땡전 뉴스’가 아니라 ‘땡박 뉴스’일 뿐이다. 이정현 전 홍보수석이 “하필이면 대통령이 오늘 케이비에스를 봤으니 내용을 바꿔달라”고 한 말은 이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민의 안위보다 대통령의 심기 경호, 꽃다운 젊은 목숨의 희생보다는 대통령의 인기가 청와대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관심사다.
권력의 보도지침은 단지 길환영 전 한국방송 사장 시절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보도지침의 대상이 한국방송에만 머물 리도 없다. 정권에 불리한 기사의 축소·누락, 정권 홍보성 기사의 범람 등 지금도 방송에서 숱하게 되풀이되는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보도지침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방송의 전 영역에서 넓고도 깊숙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은 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홍보수석 본연의 업무인 협조 요청” 따위의 말로 이번 사태를 변명했다. 심지어 이 전 수석은 “홍보수석으로서 내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강변했다.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다. “뉴스 편집에서 빼달라”느니 “다시 녹음해서 만들어달라”느니 하는 말이 어떻게 정상적인 협조 요청인가. 그런 식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어물쩍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이번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쳐 책임을 묻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박근혜 대통령도 침묵으로 이 사태를 넘겨서는 안 된다. “언론장악은 가능하지 않다”는 자신의 다짐이 거짓으로 끝난 것에 대해 국민에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 권력의 언론 자유 말살은 박 대통령의 숱한 공약 파기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공약 파기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