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서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이력은 <화사집>(1941)에서 시작한다. 이 첫 번째 시집의 머리에 시집 전체의 제사와 같은 구실을 하는 시 ‘자화상’이 놓였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그 시다. 이 시는 시집 전체의 포에지랄까 정취를 규정하는 시이자 미당 시의 행로를 보여주는 전조이기도 하다. “갑오년이라던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를 슬쩍 언급하는 대목은 동학혁명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은 패배의 내면화를 보여준다. 시인은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하고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털어놓는다. 세상이 시인의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든 ‘천치’를 읽고 가든 괘념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결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은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혓바닥 늘어뜨린/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병든 개의 모습을 한 자학과 무기력을 발견한다.
누군가는 이 시에서 젊은 날의 좌절과 방황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의 그 후 행적을 보면 이 시를 단순히 청춘의 자기부정의 몸짓이라고 볼 수 없다. 일제강점 말기에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의 죽음을 칭송하는 ‘마쓰이 오장 송가’를 쓴 사실은 스물세 살 시인의 자기모멸 정서가 굴신과 순응의 세계관으로 굳어졌음을 알려준다. 해방 뒤에도 그 세계관은 변하지 않아 미당은 이승만 전기를 써 바쳤고,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전두환에게 바치는 송시를 썼다. 얼마 전 출간된 <미당 서정주 전집> 20권에서 미당의 일제·독재 찬양 시가 모두 빠졌다. 작품을 창출하는 것은 단순히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아니라 총체적 인격이다. 그 인격의 핵심을 비추는 작품을 빼버린 전집을 전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