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일 오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해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중형이 선고됐다. ‘존재만 하는 위력은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한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 성폭력 사건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해 3월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방송에 나온 지 10개월여 만인 1일, 서울고법 형사12부는 “안 전 지사가 권력적 상하관계를 이용해 범행을 했다”며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이자 평소 젠더 문제에 적극적 발언을 해왔던 그였기에, 이 사건은 큰 충격을 던진 동시에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김씨는 폭로보다 더 힘든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재판 과정에선 김씨의 행실을 문제삼는 가해자 쪽 주장이 무차별 공개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위력은 있되 행사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한 1심은 ‘피해자다움’이란 왜곡된 통념에 기대 가해자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는 최고 실형 5년이 가능하지만 이제까지 1년 이상 실형이 나온 적이 드물었다는 점에서, 안 전 지사에 대한 중형 선고는 의미가 적잖다. 항소심 재판부는 “위력은 유무형을 묻지 않는다”며 폭행·협박 등 물리적 힘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 지위나 권세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특히 재판부가 “피해자 진술이 대체로 일치하고 공소사실에 부합할 경우 신빙성이 없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으면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며 “피해자다움은 편협한 관점”이라고 강조한 것은 만연해 있는 2차 가해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지난해 대법원이 성폭력 사건 심리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 심리적 상태, 피고인과의 관계 등 종합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 파악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판시한 취지에도 부합한다.
최근 안태근 전 검사장의 직권남용 유죄판결에 이어 안 전 지사에 대한 중형 선고는, 지난해 터져나온 #미투 앞에서 사법부가 오래된 가해자 중심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김씨는 얼마 전 결심공판에서 “더이상 미투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 이 땅에 나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이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뿐 아니라 사회에 여전히 강고한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