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혁명의 아버지’ 호찌민(1890~1969)은 평생 수많은 가명을 사용했다. 1942년 이후 죽을 때까지 쓴 호찌민이라는 이름도 160개가 넘는 가명 가운데 하나다. 본명이 ‘응우옌땃타인’인 호찌민이 젊은 시절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가명은 ‘응우옌아이꾸옥’이다. 아이꾸옥(愛國)이라는 이름에서 호찌민이 품었던 뜻을 읽을 수 있다. 프랑스의 침략에 식민지가 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이야말로 젊은 호찌민의 꿈이었다. 호찌민이 이 가명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19년 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을 때였다. 파리에 망명해 있던 호찌민은 베르사유에 모인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8개조 청원서’를 작성했다. 그때 서명으로 쓴 이름이 응우옌아이꾸옥, 곧 ‘애국자 응우옌’이다. 그러나 이 청원서는 독립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겨우 자치만 요구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강대국의 호의에 기댄 것이 잘못이었다.
이후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을 향한 급진적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먼저 프랑스사회당에 입당하고 곧이어 이 당의 급진파가 탈당해 만든 프랑스공산당에 합류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호찌민의 결정을 좌우한 것은 ‘어느 쪽이 식민지 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이냐’는 물음이었다. 호찌민이 소련의 레닌이 주창한 공산주의 운동에 공감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1920년 호찌민은 레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읽고 흥분에 휩싸였다. 그 테제는 ‘식민지에 달라붙은 제국주의 촉수를 잘라내라’고 촉구했다. “나는 감정이 북받쳤다. 눈앞이 훤해지는 듯했고 가슴에는 열의와 자신감이 가득 찼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뒷날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이 된 호찌민은 자신이 레닌주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오로지 동포를 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젊은 날의 호찌민 행적을 되밟아보면 이 공개발언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찌민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년이 됐다. 그사이에 호찌민의 조국은 도이머이(쇄신)를 단행하고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베트남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승승장구하며 ‘애국자 응우옌’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며칠 뒤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린다. 베트남의 오늘이 북한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