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소장 문화재·미술품 기증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들이 상속세로 12조원을 납부한다고 28일 발표했다. 또 유산 가운데 1조원을 기부하고, 고인이 소장해온 고가의 미술품도 대거 기증한다고 밝혔다. 비록 세법에 따른 납부이긴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재벌들이 유산 상속 과정에서 이런 거액의 상속세를 낸 적이 없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투명해졌고, 삼성가도 그런 변화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하겠다. 재벌들의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관행을 바로잡는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
상속세 12조원은 사상 최고액이다. 2018년 고 구본무 엘지 회장 자녀들이 낸 상속세가 9천억원이었고, 우리나라 전체 상속세 세수가 연간 3조원 안팎이니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으로도 역대 최고액이라고 밝혔다. 외국의 부호들은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비중이 크고 유족 상속분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일 것이다.
유족들이 1조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수조원의 가치가 있는 2만3천여점의 미술품을 기증하기로 한 것도 의미가 있다. 유족들은 코로나19 등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에 7천억원, 소아암이나 각종 희귀질환에 걸려 고통을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3천억원을 써달라고 했다. 유족이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재단을 만들어 기부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기부를 한 셈이다. 쓰임새도 숙고한 것 같다. 국보 등 지정문화재가 많이 포함된 이건희 회장의 수집 미술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에 나눠 기증한다. 전례 없는 대규모 기증이다. ‘국민의 품에 돌려준다’는 취지에 부합한다.
이건희 회장은 2008년 비자금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실명 전환한 차명 재산 중에서 누락된 세금 등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액수를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고인이 못 지킨 약속을 유족이 뒤늦게나마 이행한 것은 잘한 일이다.
다만 상속세 정상 납부와 거액의 기부가 지난날의 편법적인 사전상속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삼성가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재용 부회장 등 3남매가 유산 상속과 무관하게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무려 13조원에 이른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삼성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활용한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에 뿌리를 둔 것이다. 뇌물공여죄 등으로 2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이 부회장은 그룹 경영권 확보를 위해 삼성물산·제일모직을 부당 합병한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상속세 납부와 기부를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펴는데 옳지 않다. 전혀 별개의 사안을 억지로 엮어 사면 여론 조성에 이용하는 건 상속세 납부와 기부의 의미마저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