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
대선 출마 선언 이튿날인 지난 6월30일, 국회 기자실에 인사차 들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세계일보>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선주자 윤석열’을 만든 게 여론조사임을 시인한 것이다. 윤 전 총장이 콕 집어 말한 ‘그때 그 조사’는 윤 전 총장이 검찰총장에서 물러나기 무려 14개월 전인 2020년 1월 <세계일보> 의뢰로 리서치앤리서치가 실시한 창간 기획 여론조사다. 객관식 보기에 ‘윤석열’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이 조사에서 윤 전 총장은 두자릿수(10.8%)의 지지율을 처음으로 기록했다. 야권 1위 주자였던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를 제친 첫 조사였다. 그는 현직 검찰총장으로 대선에 대한 입장을 밝힌 적이 없었지만 1년여간 계속된 여론조사를 통해 야권 1위 대선주자의 입지를 굳혔다.
이처럼 여론조사에 수반되는 밴드왜건(대세를 따라가는 현상) 효과는 윤 전 총장 같은 신인들이 한순간에 유력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임기 후반기인 2015년부터 여론조사에 등장하더니 2017년 탄핵 직후엔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인 2016년 말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보다 두자릿수 이상 격차로 앞서기도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2011년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를 양보한 뒤 지지율이 치솟으면서 다음해 대선에 도전했다.
응답률 낮으면 정치 고관여층 의견만 반영…여론 왜곡
정치 신인이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에 힘입어 현실 정치에 입문하는 패턴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정치 메커니즘으로 자리잡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성 정치인에 대한 실망과 피로감, ‘때’가 묻지 않은 참신한 인물에 대한 기대심리가 투영된 반정치적인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이미 신인이 정치에 진입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현 정치권에 대한 불만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전 총장은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이어가고 있지만, 대선 도전 뜻을 밝힌 지 3주 만에 불출마를 선언한 반 전 총장처럼 막상 현실 정치에 입문하면 지지율이 급락하기도 한다.
선거를 몇달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조사가 여론 조성을 주도하는 배경에는 대선주자들이 미래 어젠다를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역으로도 분석이 가능하다. 지지율 조사에만 관심이 쏠리다 보니 정책이나 시대정신, 사회적 과제 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젠다가 부족하거나 부각되지 못하는 틈을 파고들어 여론조사가 가장 핵심적인 ‘플레이어’ 구실을 하게 된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선주자들이 의제를 두고 경합해야 할 국면에, 별다른 이슈가 없다 보니 그 자리를 여론조사가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조직과 기반이 없고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사람들이 여론조사 지지율에만 올라탄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대중에 검증되지 않은 인사들이 여론조사로 과포장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출마 의사를 밝히지 않은 인사를 대선 여론조사에 넣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문제제기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유권자는 여론조사 보기 대상자가 출마 선언을 했는지 따지면서 응답하지 않는다. 예시 항목에 넣을 때 최소한 출마 의사를 밝힌 사람으로만 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점을 의식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019년 정치 참여 의사가 없다며 대선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보냈고,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지난해 8월 총리 시절 직무수행에 부적절하다며 여론조사기관에 이름 제외를 요청했다.
여론조사의 영향력이 정확도에 견줘 비대화된 측면도 있다. 지금처럼 응답률이 낮은 상황에서는 정치 고관여층의 의견이 많이 대변될 수 있다는 게 여론조사의 맹점이다. 지난달 자동응답시스템(ARS) 방식으로 이뤄진 여론조사 31건의 평균 응답률은 5.11%에 불과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응답률이 낮을수록 랜덤한 샘플(무작위로 얻은 표본)이라기보다 대답하고 싶은 사람들만 대답할 가능성이 높다. 응답률이 낮아지면 실제 오차범위보다 오차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당 내 경선이나 후보 단일화 과정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은 이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 간 편차가 큰 상황에선 도박이나 마찬가지라는 우려도 많다. 여론조사 문항 등에 따라 결과의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에서 일부 주자들이 역선택 방지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본격적인 경선 룰 전쟁이 시작된 이유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경선에 여론조사를 도입하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선거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며 “조사 기관마다 차이가 10%포인트 이상 나는 상황에서 유권자들도 신뢰할 수가 없고, 당사자도 승복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대선주자들이 제각기 입맛에 맞는 여론조사는 활용하면서도, 불리한 조사는 선거 공작이라고 공세를 퍼붓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도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키는 대목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 캠프는 지난 17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차기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제외되자 “여론조사가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왜 이렇게 자의적인 조사를 하는가. 과연 배경은 없는가”라며 “여론조사 기관들이 드루킹처럼 의혹을 받아서야 되겠나”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사연은 입장을 내어 “‘차기 대선 후보 적합도’에 표기되는 후보 10인은 직전 회차 조사의 ‘범진보권’ ‘범보수권’ 후보 적합도에서 각각 상위 5위까지의 후보를 모아 본 문항 보기를 구성한다. 최 후보는 범보수권에서 6위를 차지해서 보기에서 제외됐다”며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해 여론조사기관의 신뢰를 훼손하려 했다는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반박했다.
불리하면 항의, 유리하면 홍보하는 대선주자들의 ‘아전인수’
윤 전 총장 쪽도 자신의 지지율이 높게 나왔던 여론조사가 중단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특정 후보 쪽과 지지자들이 윤석열에게 크게 뒤지는 여론조사 결과가 계속되자 언론사와 여론조사기관에 강력히 항의했고, 언론사가 대선 여론조사를 갑자기 중단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해당 여론조사기관은 다른 언론사와 함께 여론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달 한국갤럽 조사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온다는 이유로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기도 했다. 민주당 이낙연 캠프에서는 매주 일요일 정례 브리핑에서 3강(윤석열·이재명·이낙연) 구도를 강조하는 등 후보에게 유리하게 나온 여론조사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문항 수를 줄이기 위해 리얼미터와 전국지표조사 등 대부분의 기관에서는 여권에선 이재명·이낙연 후보와 야권 윤석열 후보로만 한정해 양자대결 조사를 벌이고 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양자대결은 사실 진영 싸움이기 때문에 누굴 붙여도 윤석열과 이재명 정도의 지지율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19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지지율은 10%로 이재명 지사(26%)나 윤석열 전 총장(19%)과 차이가 크지만, 양자대결을 붙일 경우 윤 전 총장(36%)과 단 1%포인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인물 대결이라기보다 사실상 진영 대결로 해석되는 이유다. 정세균 캠프 관계자는 “후보가 여론조사 가상대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다 보니 유권자들의 시각에 완전히 군소 후보로 전락하는 이미지가 강화되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장나래 노지원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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