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8일 국회 본청 앞에서 오미크론 대응을 위해 추경안 대폭증액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민주당 의원들을 방문해 대화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지금 승리하는 사람은 항상 무적처럼 보일 것이다.” 작가 조지 오웰의 말이다. 2018년 휘청이는 보수를 상대로 ‘20년 집권론’을 내놓을 때 더불어민주당도 패배 없는 수권정당을 장담했다. 그러나 민주당에 압도적 승리를 몰아줬던 민심은 4년 만에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지방정부를 모두 심판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민주당 구성원들은 창당 이래 최대 위기라고 입을 모은다. 잇단 패배 때문만은 아니다. 170석 의석을 갖고 있지만 개혁의 에너지도, 방향도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한겨레>는 민주당 안팎의 목소리를 모아 거대 야당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첫회에선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민주당 의원 24명을 심층 인터뷰해 당의 위기 원인을 짚는다. 선수와 계파를 안배했으며, 솔직한 답변을 위해 이름은 밝혀 적지 않는다.
“170석의 더불어민주당은 바뀐 생태계에 기민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해가는 공룡과 같다.”
민주당의 한 다선 의원은 지난 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숱한 분당과 통합의 역사를 거치고도 “지금이 ‘삼김시대’보다 못하다”며 “과거엔 왕당파와 비왕당파가 길항하며 견제했다면 지금은 그것조차 없는 불통의 정당이 됐다”고 했다.
지난 2~5일 <한겨레>와 인터뷰에 나선 24명의 민주당 의원 대부분은 당의 위기를 ‘불통의 구조’에서 꼽았다. 과거 민감한 현안을 다루는 의원총회 현장이 서로 들이받고 비토하는 가운데 중의를 수렴하는 장이었다면 “지금은 메아리 없는 절벽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한 재선 의원은 “비공식 라인에서 의사 결정이 이뤄지면서 다수는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선거가 있으니 말은 못 하고 ‘이건 아닌데’ 하고 넘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초선 의원은 “반성을 하면 그게 분열로 이어지고 분당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트라우마가 굉장히 심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고 짚었다. 가깝게는 2016년 문재인 대표 체제를 비판하며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국민의당이 갈라지고, 멀게는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며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했던 ‘분당의 기억’이 당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의원 일부는 결과적으로 이런 침묵이 당의 건강성을 해쳐왔다고 보고 있다.
‘침묵하는 민주당’엔 몇가지 배경이 있다. 집권여당으로서 단일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부담은 부차적이다. 의원들은 무엇보다 강성 지지층과 당내 강성파의 주장이 진영 안에서 ‘절대 선’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침묵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한 다선 의원은 “강성 지지층이 같은 민주당 사람이라도 맘에 안 들면 적으로 도려내버리는 방식으로 입을 막는다”며 “그럼으로써 당의 과오나 잘못된 점을 수정할 가능성을 막아버린 점이 문제”라고 짚었다. 한 초선 의원은 “이게 진정한 당내 민주주의인지 의구심이 든다”고도 했다. 여기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초선 의원은 문 전 대통령이 강성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을 ‘민주주의의 양념’이라고 옹호했던 점을 거론하며 “당이 건강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이후) 조금만 뭐라고 하면 ‘수박’(민주당인 척하는 보수인사)이니 뭐니 해서 소통이 안 되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외부를 향해서도 ‘압도적 다수’를 형성한 여당다운 소통과 설득에 나서지 않았다. 의원들은 입을 모아 문재인 정부 임기 말 추진한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입법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당시 입법은 당론으로 추진됐다. 한 재선 의원은 “국민들이 설득이나 정치적 타협보다는 다수당의 숫자로 밀어붙인 게 반복된다고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초선 의원도 “검수완박 추진 과정에서 벌어진 꼼수 탈당 등은 엄청난 부담이었다”고 돌이켰다.
“무책임했다”는 자기비판도 많았다. 한 다선 의원은 “문재인 정부 취임 이후 우리가 한 건 내부 권력투쟁뿐이었다.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 당을 어떻게 끌고 갈지, 당에서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의원은 “서로 책임을 반성하는 게 먼저여야 하는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책임만 전가하고 있다”며 “희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보신주의’가 당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등 개혁진영이 선취해온 도덕성마저 상황 논리에 휩쓸려 갔다. ‘내로남불’로 대표되는 도덕성의 위기다. 2021년 4·7 보궐선거 당시 서울시장·부산시장 후보 공천은 무책임한 내로남불 정치의 정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꼽힌다. 민주당은 당시 박원순·오거돈 시장의 성폭력 사건으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됐지만 ‘당 소속 선출직의 중대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한 경우 재보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당헌을 고쳐 후보를 냈다.
한 초선 의원은 “무슨 낯으로 민주당이 후보를 내나. 얼마나 무례한 오판인가”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재선 의원도 “당시를 복기해보면 심각한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있었다”며 “성폭력 문제 등을 우리가 여러번 사과했어도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의 ‘도덕성 리스크’가 집중포화를 받을 때 내로남불의 민주당은 유권자에게 다시 각인됐다. 한 재선 의원은 “조국 사태로 내로남불이란 비판 받으면서 당의 도덕적 문제가 많이 노출됐다”며 “그런데 또 우리는 도덕적 리스크가 있는 이재명 후보를 (대선 후보로) 뽑은 게 아니냐”고 돌아봤다. 또 다른 초선 의원은 “지선에서 이길 수 있는 곳까지도 진 건 이재명·송영길 등 반성해야 할 주체들이 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책임은 무능으로 이어졌다. 집권세력으로서 민주당이 정책정당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자성도 나왔다. 몇몇 의원은 최근 소상공인 손실보전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불거진 ‘50조원대 초과세수’ 사태를 보고 “우리 집권세력 전체의 무능을 다시금 확인했다”고 했다. 당시 민주당 안에선 ‘전임 정부에서는 재원이 없다더니 정권이 바뀌니 초과세수가 발생한단 거냐’고 국정조사 카드를 내밀며 기획재정부를 크게 비판했다.
한 초선 의원은 “부동산 시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진영논리만 작동했고, 탈원전 정책도 가치만 내세우고 준비를 못했다”며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유능함이 부족했고 그것이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고 돌아봤다.
그런데도 한없이 오만했다. 한 초선 의원은 “우리의 의제만 맞다고 생각하고, 국민들이 바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응답을 못했다”고 반성했다. 코로나19와 집값 폭등으로 민생이 흔들릴 때 국민에 발맞추기보다 여당의 입장을 관철하는 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이 초선 의원은 “경제정책부터 시작해서 디테일을 잘 모르는 채 말로만 선의로 ‘우리 뜻은 그게 아니었다’는 식으로만 했으니까 어설픈 정책들이 나간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재선 의원도 “소상공인 지원 등 국민이 원하는 정책엔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검찰개혁 등에선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거라고 고집만 부렸다”며 “국민들의 평가를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모면해온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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