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2월 초 당시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장 권영해는 작전명 ‘아말렉’의 실행을 지시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아말렉 부족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이 작전의 목표는 야당의 김대중 후보 낙선이었다. 공작 하수인으로는 재미동포인 윤홍준을 기용했다. 윤홍준은 대선 직전 베이징과 도쿄, 서울에서 차례로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한테 돈을 받았다”고 허위 주장했다. 그는 안기부한테 20여만달러를 받으러 대선 직후 재입국했다가 붙잡혔다.
검찰 수사 결과 아말렉 작전뿐 아니라 ‘오익제 편지’ 사건도 안기부가 북한 당국과 짜고 일으켰던 북풍 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안기부는 월북했던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로 하여금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보내게 한 뒤 이를 교묘하게 공개했으며, 여당 쪽은 이를 근거로 김대중 용공설을 퍼뜨렸다.
권영해는 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국 안기부법의 정치관여죄와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안기부 자금을 횡령한 사실 등이 추가로 밝혀져 그는 모두 7년10개월형에 처해졌다. 북풍 공작에 가담했던 박일룡 1차장, 임광수 101실장, 임경묵 102실장 등 안기부 간부 9명도 처벌을 받았다. 이에 안기부는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꿔, 정치공작기관이 아니라 대외정보기관으로의 새 출발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18대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가 ‘아주 이상한 일’을 하다가 야당 선거 감시팀에 걸렸다. 종일토록 자신의 집에서 일한 이 직원의 주요 업무는 수십개의 아이피 주소와 아이디로 ‘오늘의 유머’ 게시판 등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 찬반 표시나 댓글 달기 또는 글을 올리는 것이었다. 4대강 사업 등 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것뿐 아니라 야당 후보를 비판하는 글도 있었다. 그의 아이디 중 일부는 민간인인 제3의 인물이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의 ‘협업’으로 인기있는 글들이 베스트글로 채택되지 못한 채 밀려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원세훈 체제에서 확대 개편한 심리전단에는 70여명의 직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장 원세훈은 이러한 ‘국내용’ 심리전을 오래전부터 직접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지난주 입수해 공개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 따르면, 원세훈은 확대부서장회의에서 “심리전단이 보고한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은 내용 자체가 우리 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명심”(2010.7.19)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 그는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 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직접 유관기관장에게 업무협조를 하기 바”(2011.11.28)란다고도 했다.
국정원은 ‘종북세력의 움직임에 대처하기 위한 고유의 업무’라고 설명했지만, 인터넷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는 것, 젊은층을 정권의 ‘우군’으로 만드는 것, 민노총과 전교조 등 합법적인 단체를 ‘국내 내부의 적’으로 규정해 싸운 것 등등은 모두 정권 옹호와 재창출을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다. “원장·차장과 그 밖의 직원은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정치관여 금지’ 조항(국정원법 제9조)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21일 원세훈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4년간 국정원장을 지낸 그는 검찰 수사뿐 아니라 국회 국정조사장에도 불려나가야 한다. 앞날이 험난하다.
‘원세훈 작전’의 목표였을 정권재창출에 성공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그에게 ‘우군’들이 적지 않다. ‘공범 관계’인 국정원은 자신들의 행위를 폭로한 내부고발자를 찾아 검찰에 고발하는 등 방어막 치기에 나섰다. ‘수혜자’인 박근혜 대통령도 국정원의 일탈행위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을 외면하는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의 보도 태도도 우호적인 환경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법과 원칙을 강조했던 박근혜 대통령 시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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