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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얼버무리고 미루고…‘합의문 묘수’ 패트엔 안 통하는 이유

등록 2019-06-07 05:00수정 2019-06-07 10:04

정권교체 뒤 작성된 합의문 15건 보니

여야 갈등 녹인 디테일은?
모호한 표현, 열린 해석 길 터
“별도 기구로…” 쟁점 미루기
이견 없는 사안은 일괄 처리

온갖 수식어 동원해 작성
‘적극 검토, 협력…’ 표현 사용
국면 전환 활용 성격 짙지만
정치적 구속력 탓 기싸움 팽팽

이번 여야 대치 길어지는 이유
봉합 어렵고 마감시한 명시된 탓
“합의 원칙” “합의처리” 날선 신경전
국회 정상화 절충점 찾아낼지 주목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 원내대표들이 지난 4월22일 국회 정론관에서 선거제·개혁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 지정) 처리 합의안 발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 원내대표들이 지난 4월22일 국회 정론관에서 선거제·개혁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 지정) 처리 합의안 발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국회 정상화를 두고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한달 넘게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속사정은 ‘패스트트랙’에 대한 입장차지만 겉으로 드러난 전선은 합의문에 적을 문구, ‘(패스트트랙에 올린 법안은) 합의처리를 원칙으로 한다’(민주당)와 ‘합의처리 한다’(한국당) 사이에 그어져 있다. 언뜻 보기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문구를 차지하기 위해 여야는 치열한 기싸움 중이다. 6일 <한겨레>는 20대 국회에 들어 정권이 바뀐 뒤 여야 원내대표가 서명한 15개 합의문을 분석해 ‘합의문의 공식’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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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하게 표현하고, 어려운 건 미루고…합의문의 공식

2017년 5월부터 민주당과 한국당이 모두 참여해 작성한 합의문은 총 15건이다. 이 합의문들은 모두 치열한 여야 간 대립과 갈등을 뚫고 작성됐다. 어떤 묘수가 있었던 걸까.

합의문 작성의 첫째 원칙은 ‘모호하게 작성하라’다. 양쪽 모두 소속 의원이나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각자 입맛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열린 표현’이 필요하다.

사립유치원의 회계 투명화를 골자로 하는 ‘유치원 3법’이 대표적이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관련 법안들을 대표 발의했지만 자유한국당의 결사적인 반대로 법안 처리가 어려웠다. 여야는 11월21일자 합의문에 ‘유치원 3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립유치원 관련법 등의 민생법안을 정기국회 내에 처리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유치원 3법’은 민주당이 발의한 특정 법안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한국당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합의문 작성으로 국회는 정상화됐지만 민주당은 한국당과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유치원 3법은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됐다.

모호한 표현으로도 갈등 상황을 눙칠 수 없을 땐 ‘미루기’ 전략이 사용된다. ‘별도 기구를 만들어 논의하자’는 식의 문구가 대표적이다.

2018년 7월 여야는 ‘규제혁신 5법’ 등을 놓고 극심한 대립 끝에 합의문을 작성했다. 민주당은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 활성화를 위해 기존 규제를 유예하는 규제 샌드박스 5법을 추진했으나 한국당은 규제 완화 법률 개정엔 긍정적이지만 더 완화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대립했다. 결국 7월25일 합의문에는 ‘시급한 민생경제 관련 법안을 8월 임시회에서 처리하기 위해 3당 정책위의장과 수석부대표가 참여하는 민생경제 법안 티에프를 구성해 논의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모호한 표현’과 ‘미루기’로만 합의문을 작성하는 데엔 부담이 따른다. 이때 종종 동원되는 문구가 ‘비쟁점 법안 일괄처리’다. 2018년 11월 여야 합의문에 등장한 ‘윤창호법 등 여야 간 쟁점 없는 민생법안을 정기국회 내에서 처리한다’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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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문에 많이 들어간 단어는?

이런 공식에 따라 작성되는 문건이다 보니 합의문에는 ‘논의’ ‘노력’ ‘협력’ 검토’ 같은 명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조속히’ ‘신속하게’ 등 부사도 단골손님이다.

패스트트랙 사태의 실마리가 된 지난해 12월15일 합의문에도 ‘적극 검토’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당시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서명한 7문장짜리 합의문 중 2문장에 이 문구가 사용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 ‘석패율제 등 지역구도 완화를 위한 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한다’. 이 문구들은 4개월 뒤 패스트트랙 지정 여부를 둘러싸고 여야 대립이 극심해지자 여야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적극 활용됐다. 민주당 등은 ‘검토한다고 합의해놓고 어깃장을 놓고 있다’며 한국당을 공격했고, 한국당은 ‘검토한다고만 했지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민주당의 한 전략통 의원은 “합의문은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호도책 성격이 강하다. ‘논의’ ‘협력’ 등의 단어도 정치적 수사일 뿐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갈등의 불씨가 되곤 하는 합의문을 왜 작성하는 걸까.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정치적 구속력은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직 원내지도부 인사는 “정치적 상황 변화를 이유로 합의문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비판받는 데 대한 부담은 존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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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합의 유독 어려운 이유…“처음 맞닥뜨린 상황”

현재 여야 간 협상은 문구 조정 작업에 막혀 진도를 못 내고 있다. 합의문 작성의 공식이 있는데도 대립이 길어지는 이유는 “패스트트랙이기 때문”(민주당 관계자)이다.

지난 4월 말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법안은 여야 합의와 상관없이 최장 330일이 흐르면 가부간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난다. 패스트트랙 지정에 5분의 3이 이미 동의한 이상 가결 쪽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갈등을 봉합하거나 결정을 미뤄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협상 경험이 많은 한 실무자는 “여의도에서는 모든 게 합의된다. 합의문 자체가 정책을 통과시키려는 목적보다 상대에게 명분을 줘서 국회를 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장차가 아무리 커도 여러 표현을 동원해 합의 문구를 작성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패스트트랙은 마감시한이 정해져 있어 절충점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서영지 김원철 기자 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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