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리 교수 고발’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이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민주당을 빼고 찍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한 교수·신문사를 고발했다가 하루 만인 14일 고발을 취하했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오만한 태도’라는 당 안팎의 거센 역풍을 맞은 탓이다. 하지만 취하 과정에서 보인 민주당의 황당한 대응이 또 다른 후폭풍을 불렀다. 당 공보국이 문자메시지로 취하 사실을 공지하며 ‘유감’을 표명한 게 전부인 데다, 글쓴이의 ‘안철수 캠프 출신’ 전력을 문제 삼으며 고발을 정당화하는 태도마저 보였기 때문이다. 당 차원의 공식 사과도 없고, 책임을 지는 이도 없었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당 지도부의 안이한 상황 인식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 ‘안철수 캠프 출신이라 고발했다’ 자백 민주당은 14일 오전 기자들에게 공보국 명의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임미리 교수 및 경향신문에 대한 고발을 취하한다”며 “우리의 고발조치가 과도했음을 인정하고 이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전날 민주당이 고발한 칼럼은 지난 1월29일치 <경향신문>에 실린 임미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민주당만 빼고’라는 제목의 글이다. 민주당은 임 연구교수가 이 칼럼에서 “촛불정권을 자임하면서도 국민의 열망보다 정권의 이해에 골몰”한 민주당을 비판하며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고 쓴 대목을 문제 삼았다. 임 교수와 <경향신문> 관계자가 공직선거법 58조의2(투표참여 권유활동) 조항을 위반했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조항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 아닐 때 투표참여 권유를 빙자한 선거운동으로 선거질서를 혼탁하게 만드는 행위를 금지·처벌하기 위한 조항이다.
민주당은 이날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고발 취하와 사과’를 결정했다. 복수의 최고위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구동성으로 고발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감 표명 말고 사과하라고 최고위원 전원이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당은 ‘유감’을 표했다.
유감 표명 방식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당 대표 명의로 고발이 이뤄졌으면 사과나 유감 표명도 당 대표가 하는 게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중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사과나 반성의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특히 민주당이 고발을 철회하며 글쓴이의 전력을 언급한 대목은 ‘최악의 대응’으로 꼽힌다. 당은 문자메시지에서 “임 교수는 안철수의 씽크탱크 ‘내일’의 실행위원 출신”이라며 “경향신문에 게재한 칼럼이 단순한 의견 개진을 넘어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고발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편을 가르고,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며, 상대편이라는 낙인을 찍어 고발했다는 ‘고백’인 셈이다.
■ “중도층 이반 불러온다. 당이 후보들을 도와달라” 한창 선거준비 중인 민주당 의원들 대부분은 이 사안을 ‘악재’로 보고 당의 전향적 조치를 촉구했다.
유력 차기 대권주자이자 공동선대위원장에 내정된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전날 오후 윤호중 민주당 사무총장에게 전화해 ‘임 교수 고발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김부겸 의원(대구 수성구갑)도 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구 경북에서 선거 치르고 있는 저를 포함한 우리 당 예비후보들, 한 번 도와주십시오”라며 “보수층의 공격이야 얼마든지 감내하고 제 나름대로 설득하겠지만, 젊은 중도층이 고개를 저으면 제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이 건은 누가 뭐라고 해도 중도층의 이반을 불러올 가능성이 큽니다”라고 적었다. 홍의락 의원(대구 북구을)도 페이스북에 “오만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민주당 이야기”라며 “어쩌다 이렇게 임 교수의 작은 핀잔도 못 견디고 듣기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썼다. 정성호 의원도 글을 올려 “오만은 위대한 제국과 영웅도 파괴했다”며 “항상 겸손한 자세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 초선의원은 “지금 수도권 상황이 심각한데 지도부는 너무 태평하다. 의원들이 매우 화가 나 있다. 취하하는 메시지도 오만하기 짝이 없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 있는 사람의 공천 탈락 수준까지 가야 당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 제발등 찍은 민주당 이번 고발이 전략적으로도 실수지만, 논리적으로도 민주당의 자충수라는 비판도 나온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탄핵 위기에까지 몰렸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한다는 정당에서 선거법을 활용해 비판 세력을 옥죌 수 있냐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4년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지국장 기소를 비판했던 내용도 다시 회자되고 있다. 당시 문 의원은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고 말했다. 검찰 개혁을 하겠다면서 검찰 고발을 남발하는 행태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고 “스스로 ‘민주’를 표방하는 정당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악법 규정들을 활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정치적 사건을 고소고발로 푸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가져온 폐해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김원철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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