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왼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종철 노동당 부대표(당시)가 2013년 9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진보의 길을 묻다'는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김종철과 박용진. 1990년대 학번으로 대학 시절 민중민주(PD)계열 학생운동을 했던 두 사람은 1998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에서 처음 대중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한때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미래’를 상징했던 두 사람이지만, 지금의 위치는 다르다. 김종철은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섰지만 낙선했다. 박용진은 서울지역 민주당 최고 득표율(64.45%)로 재선에 성공했다.
두 사람의 30대는 화려했다. 36살 김종철은 2006년 민주노동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돼 지방선거를 치렀다. 박용진은 2004년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첫 대변인을 맡아 2년 넘게 당의 ‘얼굴’로 활약했다. 두 사람의 동고동락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뒤 평등파가 창당한 진보신당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11년 독자적 진보정당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박용진이 진보신당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박용진은 민주당 대변인(2013년)을 시작으로 홍보위원장(2014년), 비상대책위원장 비서실장(2016년)을 거쳐 2016년 20대 총선에서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서울 강북을에서 그가 얻은 득표율(51.08%)은 같은 지역에서 진보신당 소속으로 치른 18대 총선 득표율(11.68%)의 5배에 가까웠다. 의정 활동을 통해서도 뚜렷한 성과를 냈다. ‘유치원 3법’ 입법과 삼성 불법 승계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는 박용진을 집권여당 초선의원들 가운데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았다.
같은 기간 김종철의 정치인생은 쓰라림의 연속이었다. 2008년 18대 총선을 시작으로 서울 동작을에 4차례 출마했으나, 단 한번도 의미 있는 득표율을 기록하지 못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이번 총선에선 처음으로 비례대표 후보에 도전해 상위권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청년·여성·장애인 등 소수자를 정책적으로 배려한 경선제도 아래서 후순위인 16번을 배정받아 낙선했다.
이런 김종철의 개인사는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당 안팎에서 김종철의 자질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일찌감치 기성 정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된 앞세대 운동권과 그가 달랐던 점은 “주류가 되려는 욕망이 부족했던 것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진보정당 안에서도 선배 세대와 외부 영입 그룹에 밀려 주목받는 당직·공직은 경험하지 못했다.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제도정치에 진보정당의 공간이 좁다 보니 오랜 기간 당에서 헌신한 김종철·강상구(전 교육연수원장) 같은 40대 후반 세대들이 계속해서 희생만 강요받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양당제라는 정치현실과 진보정당의 부침이 만든 운명이 야속할 법도 하지만, 김종철은 후회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 만하게 바꾸는 것은 “능력 있는 개인들의 선의가 아니라, 정당이란 결사체에 모인 약자·소수자의 조직된 힘과 의지”라고 여전히 그는 믿는다.
정환봉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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